[시론] 英 재난대응법이 주목되는 이유

입력 2014-05-12 20:34  

"긴급 재난에 신속 대처하기 위해
실효적이며 법치이념에 부합하는
법률 정비부터 제대로 해두어야"

이호선 < 유럽연합대학원(EUI) 객원교수 hosunlee@kookmin.ac.kr >



사건의 규모와 심각성에 대한 인식 실패, 대응의 지연 및 미흡, 종종 상당한 영역 다툼으로 이어지는 권한과 책임에 대한 혼선, 엉성한 조직체계와 대내외적인 효율적 소통의 부재, 정부 조직 내의 조율 실패, 리더십과 비전의 실패….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이지만 우리 이야기는 아니다. 2005년 9월 태풍 카트리나로 인해 남부지역에 큰 재해를 입은 미국의 국가조사위원회가 2006년에 발간한 보고서의 일부다. 이 보고서에서 지적된 문제점들은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안전불감증 문화에서부터, 생명 존중의식과 직업윤리의 실종, 위기관리 매뉴얼의 사장, 전관예우의 전방위적 진화를 상징하는 ‘관피아’의 구조적 비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치부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목격했다. 한편으론 각종 인재와 불가항력적 자연재해, 테러의 위험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국가가 과연 얼마나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피해를 조기에 수습하며 최소화할 수 있는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실질적인 위기대처능력은 닥쳐봐야 검증되겠지만, 적어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 정도는 국가가 갖고 있어야 한다. 그 가이드라인은 결국 재난에 대비한 법률을 제대로 정비하는 것이다. 현재 관련된 법으로는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수난구호법 등이 있지만 재난의 성격, 응급대처의 필요성, 사후수습 기간의 장단 등 다양한 사태에 대비하기에는 경직되고 권한과 책임이 모호한 구석이 많다. 예컨대, 재난관리기본법에 있는 특별재난구역 선포에 관한 내용은 해당 지역에 대한 특별지원이 주를 이루고 있을 뿐, 정작 비상사태 발발 시 일정한 지역 내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잠정적인 자유 및 재산권 제한을 기존의 사법체계와 어떤 식으로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9·11 테러 당시 미 연방항공청(FAA)은 긴급히 미국 상공의 비행을 모두 금지시켰다. 미 항공 역사상 초유의 조치였다. 여기에 아직 공중에서 테러범들에 의해 장악된 여객기가 추가 공격을 할 정황이 포착되자 딕 체니 부통령은 착륙 지시에 따르지 않는 어떤 비행물체라도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헌법을 비롯해 어떤 법에도 부통령에게 그런 권한은 주어져 있지 않았다. 당시의 긴급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요, 의무였다고 할 수 있지만 법치주의의 이념에 비춰보면 바람직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비단 다른 나라의 일일까? 우리도 효과적인 위기대처 및 수습과 헌법 원리 존중 사이의 조화를 미리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긴급 재난에 신속 대처하도록 정부에 한시적으로 법률과 동등한 효력을 갖는 명령을 발하도록 위임 입법 근거 규정을 두되, 그 대상과 범위 등을 미리 정해 초동대처와 법적 근거 마련의 시간적 격차를 줄이면서 위법성 논란을 막아야 한다. 이 모델 중 하나로 영국의 ‘2004년 비상대처법’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법은 긴급사태 시 내각이 법률에 준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되, 그 발령 요건을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사후 의회의 승인을 얻도록 하는 한편 기본권 제한의 범위도 특정하는 등으로 비상 입법으로서의 실효성과 법치존중 이념 간의 형평을 꾀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돌발사태 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법과 제도가 필요한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 국민들도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마음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 영원히 살아있을 저 피터팬들이 바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이호선 < 유럽연합대학원(EUI) 객원교수 hosunlee@kookmin.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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