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매도 콤플렉스

입력 2014-05-20 20:37   수정 2014-05-21 05:34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얼마 전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국내 굴지의 조선업체에 대해 ‘매도’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애널리스트 생활 12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증권 바닥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왜 화제인지는 알고도 남는다. 애널리스트들에게 ‘매도’라는 말은 사실상 금기어다. 뒷감당이 어려워져서다. 일단 해당 기업과는 ‘원수’ 되기 십상이다. 앞으로 기업 탐방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그 기업 주식을 가진 기관투자가로부터도 미운 털이 박힌다. 증권사 입장에서 기관투자가는 VIP다. 게다가 일반투자자들로부터의 항의도 만만치 않다.

0.04%도 안되는 매도 리포트

사정이 이러니 애널리스트가 내는 리포트에서 ‘매도’라는 단어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지난해 2만5000여개 리포트 중 매도의견은 10건도 안됐다고 한다. 0.04%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이게 말이 되나. 연간 코스피지수만 봐도 상승과 하락일 비중이 거의 비슷(2013년 상승 48%, 하락 50%)한 게 통례다. 그런데 주가하락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정확한 기업 및 주가분석은 포기했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물론 ‘매도’라는 노골적 표현 대신 ‘비중 축소’ 또는 ‘홀드(hold)’로 투자의견을 하향 조정하거나 목표주가를 내리는 고육책이 종종 사용된다. 하지만 진정한 홀드와 매도를 구분할 수 없는 리포트라면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최근 약간 개선의 조짐은 있다. 올 들어 5월 셋째주까지 나온 9610건의 리포트 중 매도는 10건으로 0.1%를 간신히 넘어섰다. 지난해와 견주면 크게 늘었지만 아직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외국(5~10%)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렇게 된 데는 증권사 사정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 특유의 매도 콤플렉스가 작용한 측면도 적지 않다. 주가든 부동산이든 올라야 정상이고 선(善)이며 하락은 비정상이고 악(惡)처럼 은연 중 인식돼 왔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다. 가계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 70%대로 절대적이고 주식 부동산 이외에는 마땅한 투자대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중한 자산의 가치가 떨어지는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투자자산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당한 평가나 미래가격 예측은 제한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판 ‘닥터둠’도 있어야

공매도에 유독 부정적인 국내 여론도 이런 매도 콤플렉스와 무관치 않다. 흔히 공매도가 주가를 끌어내리는 주범이라고들 하지만 보유 주식을 파는 것과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서 기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공매도 세력 때문에 사업을 못 해 먹겠다며 기자회견까지 하는 게 현실이다. 미운털이 박힌 건 파생상품도 마찬가지다. ‘주가급락’ 하면 떠오르는 게 파생상품이다 보니 무슨 일만 생기면 단골 규제 대상이 된다.

최근 주식시장은 거의 빈사상태다. 신규 상장은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고 거래량 감소로 증권사에는 전례 없는 구조조정 한파가 불어닥치고 있다. 부동산시장 역시 잠시 반짝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내리막이다.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믿을 만한 객관적 투자지표가 없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다. 그저 ‘오른다’란 말만 믿었다가 수차례 낭패를 본 투자자들이 아예 시장을 떠나버렸다는 얘기다.

좀 더 많은 ‘매도’ 리포트가 나와야 한다. 한국판 닥터둠이 한 명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매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시장 신뢰가 높아지고 시장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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