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韓·中 정상, 밀약은 있었는가

입력 2014-07-07 20:38   수정 2014-07-08 05:06

韓·中 정상회담 후폭풍 만만치 않을 수도
중국 대국주의 재확인, 한국 끌려만 갔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 재평가 유혹받을 듯
韓·美관계 더 강력해야 중국도 균형잡는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미국은 규칙을 만든다

빌 클린턴이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서울의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건 것은 1997년 11월28일이었다. ‘한국은 이미 사실상의 디폴트 상태에 들어갔으니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조치를 신속하게 받아들이라’는 독촉 전화였다. 클린턴의 전화는 그나마 미국 국방부의 다급한 주장이 먹혔기 때문이었다. 국방부는 12월 초 한국의 디폴트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재무부 관리들에게 “이것은 휴전선 너머 100만의 적군과 대치한 나라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논리를 펴며 긴급한 지원을 요청해 클린턴의 지지를 끌어냈다. 그러나 재무부는 이후에도 한국을 철저하게 골탕 먹였다. 재무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은 클린턴의 전화 며칠 전인 11월19일 언론 기고문을 통해 “한국은 강제적으로라도 길들여야 한다”고 못 박아둔 상태였다. 또 그 얼마 전에는 ‘실로 거만한’ 한국의 관료집단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드러내는 공개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클린턴은 꼭 한 달 전인 10월에도 YS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 소비자들이 연일 규탄하고 있는 “소고기 O-157 문제를 이제는 좀 덮어달라”는 당부의 전화였다. 당시 YS는 자칭 정치 9단이었다. 젊은 클린턴에게 “정치란 말이야…!”라며 만날 때마다 어깨를 두드리며 한 수 가르쳐 준다고 생각했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엄포를 놓던 중이기도 했다. 한·미·일 간에 실로 많은 일들이 이 몇 해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쌀 협상, 소고기 협상, 자동차 협상이 차례로 개최됐다. YS는 일본을 밀어붙인 끝에 일본으로서는 치욕적 자백인 고노담화를 얻어내기도 했다.

한국의 장관들은 미국 출장을 마치고 공항을 들어서면서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였다. ‘미국산 담배를 한 개비도 팔아주지 않았다!’ ‘미국 자동차를 한 대도 수입하지 않았다!’ ‘소고기 수입은 철벽방어를 해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가을에는 드디어 소고기 병원균 O-157 문제가 일본 홍콩 싱가포르 한국에서 잇달아 터졌다. 미 농무부가 신속하게 대처한 결과 싱가포르 홍콩 일본이 1주일 만에 차례차례 문제를 덮었다. 그러나 한국은 미 대사관 앞 시위를 포함해 한 달여 동안이나 미국을 물고 늘어졌다. 급기야 클린턴의 부탁 전화가 YS에게 걸려왔다. 그로서는 일시 의기양양했을지 모르지만 한 달 뒤에 걸려온 전화는 달랐다. “너희는 망했다. 구조조정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YS는 “어, 이게 아닌데…”라며 희미한 한·미 관계의 기억들을 잠시 역추적해봤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은 기회를 엿보고…

당시 일본의 주제어는 전후 총결산이었다. 고노담화는 김영삼 정부의 집요한 요구와 일본 내 총결산 분위기의 결실이었다. 일본은 놀랍게도 미국 중심인 IMF 체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꺼내든 것이 AMF(Asia Monetary Fund)였다. 미국 빼고 아시아끼리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모두 1000억달러 규모. AMF 창설을 통해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는 필사적인 전략이었다. 10월 홍콩 IMF 총회는 일본의 승리가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국과 동남아가 외환위기로 쓸려 들어감으로써 AMF라는 가공의 건물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해 12월 긴급차관이라도 얻어보려고 한국의 경제부총리가 급거 도쿄에 날아갔을 때 미쓰즈카 대장상 앞으로 이미 한 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루빈 미 재무장관이 보낸 사신에는 “한국 문제는 IMF 틀 내에서 처리할 테니 일본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요지였다. 일본이 보유 중인 미국 국채를 팔아치우면 미국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등의 안줏거리 주장들이 일본 신문에 더러 게재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내 조용해졌다. 그런 과정 속에서 한국은 역사에 없던 혹독한 구조조정을 수용하는 IMF 체제로 진입했다. 당연히 일본도 AMF 창설안을 백지화했다.

아니 일본의 20년 불황 자체가 일본의 국부삭감을 요구하는 미국의 새로운 규칙, 다시 말해 BIS비율 때문이었다. 게임의 규칙 즉, 국제 무역의 룰을 정한다는 것이 바로 국력의 크기였다. 이는 미국의 무역적자, 다시 말해 바잉파워의 결정력이기도 했다. 무역에서 적자를 보지 않는 나라는 제국이 될 자격이 없다. 이는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이 특히 기억해야 할 철칙이다. 지금 중국의 대한(對韓) 무역적자만큼 중국은 한국에 발언권을 갖고 있다. 미국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 반대가 결코 아니다.

1989년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8%의 BIS자기자본비율 규제는 은행의 대출 삭감, 주식과 채권 매각, 해외 대출 회수를 초래했다. 지가하락과 주가하락, 장기불황은 그 결과였다. 아시아 외환위기는 일본 금융기관들이 대출을 회수한 결과였다. 아베는 지금 집단자위권 변경, 미국산 셰일가스 대량 수입 등을 통해 ‘미국의 강력한 동맹으로서의 일본’을 새로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일본은 20여년간 대가를 치렀다.

거친 권력 의지 내보이는 중국

외환위기가 아직 서슬이 퍼렇던 시절 한·중 간 초유의 무역분쟁이 터졌다. 1999년 9월 말 농가 피해를 우려한 농협이 중국산 마늘에 대한 피해구제를 정부에 신청했다. 조사결과 피해가 인정됐고 재정경제부는 2000년 6월 중국산 냉동마늘과 초산조제 마늘의 관세율을 30%에서 최고 315%로 대폭 올리는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했다. 중국의 무자비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중국은 아무 관련이 없는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을 즉각 수입중단해버렸다. 무역액 균형 따위의 개념이 있을 리 없었다. 실로 무식한 보복이었다. 당연히 중국의 조치는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배였다. 수개월의 협상에서 한국은 완패했다. 흑자국은 적자국에 큰 소리를 칠 수 없는 법이었다. 협상 결과 관세를 원위치로 돌리고 세이프가드도 2003년부터 없애는 것으로 한국은 중국의 분노를 달랬다.

일본이 AMF를 내놓았듯이 이번에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라는 이름의 ‘아시아끼리 펀드’를 제안했고 한국은 말을 더듬고 있다. 미국이 아시아 회귀를 주창하며 애써 심어놓은 일본의 소위 집단자위권을 중국은 한국을 앞장세워 짓밟았다. 사실 한국의 대중국 수출의 거의 절반은 미국으로 재수출된다. 목적지로 따지면 중국은 경유지다.

한국선 싸구려 책략만 넘치고

문제는 등가성이었다. 한국이 얻은 것이 없다. 이런 정도의 비대칭이라면 그 이면에는 필시 한국 통일에 대한 무언가의 밀약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아니 그 반대다. 한국 통일은 없어지고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이라는 괴이쩍은 단어가 등장했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약속도 있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미 여러 개의 핵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비핵화라고 한다면 이 조항에 해당하는 당사국은 한국밖에 없다. 역시 괴이쩍은 자승자박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핵 불용이라고 외쳤지만 시진핑은 어색한 침묵이었다. “어차피 한국은 DNA상 중국 편으로 기울 것”이라는 아베 측의 비아냥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시진핑은 임진왜란을 말했지만 고구려가 중국에 망했고, 백제가 중국에 망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병자 정묘에 걸친 두 번의 무자비한 침공도 중국이었다. 6·25 전쟁에 개입해 분단 한국을 만들어 낸 것도 중국이다. 실로 기억력의 문제다. 서울의 독립문은 중국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영은문을 헐고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자며 지어진 것이다.

밀약은 있었는가. 그것은 과연 친구를 배신할 만큼 중요한 그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물어볼 수밖에 없다. 얄타 회담 당시 미 국무부의 소련 간첩 엘저 히스는 한반도를 소련에 넘기고자 했다. 그 결과가 분단이었고 애치슨 라인이었다. 지금 누가 대한민국을 해양 아닌 대륙에 떼어 붙이려는 것인가. 한미관계가 더 강력해져야 중국도 균형감각있는 한국 정책을 펼 것이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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