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대화] "아버지는 말씀을 잘 안하셨죠, 단지 모범 보이셨을 뿐…인간은 원래 불완전…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대책 세워야"

입력 2014-07-09 22:50  

'김천 3才' 정해창 前 법무부 장관 정해왕 前 韓銀 금융경제연구원장 정해방 금융통화위원


[ 김유미 기자 ]
어린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주 시골 길을 걸었다. 국어교사였던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다. 동네 어른과 마주치면 “인사드려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들들이 고개를 까딱 숙이면 “절을 해야지” 하고 나지막이 나무랐다. 형제는 군것질거리 한 번 사준 적 없는 단벌 신사 아버지가 야속했다.

1950~1960년대에 가난한 교육자가 5남2녀를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카시아가 핀 학교 뒷산에서 손수 꿀벌을 쳤다. 마지막 부임지였던 경북 상주의 낙동중학교로 옮길 때도 벌통을 지고 갔다. 1969년 출근길에 순직하기까지 아버지는 소박하고 담백하게 살았다.

“평생 꿀벌처럼 사셨죠. 그 삶을 이해하는 데 30년 넘게 걸렸습니다.”

큰형인 정해창 전 법무부 장관(현 좋은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77)의 얘기에 정해왕 전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67), 정해방 금융통화위원(64)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형제는 세간에서 ‘김천 3재(才)’라고 불렸다. 경북 김천이 낳은 소문난 천재란 뜻이다. 셋 다 경북고와 서울대를 나왔고 법조와 금융, 경제라는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 전 장관은 과거 사시와 행시를 동시에 붙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고, 정 전 원장은 테니스 선수로도 활약한 ‘엄친아’이며, 정 금통위원은 기획재정부 관료 시절 계산기로 불릴 만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정 전 장관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벽 액자에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뜻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김천은 아버지인 죽포(竹圃) 정윤진 선생이 해방 이후 8년간 교편을 잡으며 7남매를 키워낸 곳이다. 4남인 정 금통위원이 6·25전쟁 당시 가족들이 피난온 구미에서 태어났으니, 엄밀히 말하면 다 김천 출신인 것도 아니란다.

어머니는 ‘호랑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찬 여장부였다. 전쟁 당시 친척집에 맡겼던 재봉틀을 머리에 이고 폭탄이 떨어지는 30리 길을 뛰어간 일화는 집안에서 유명했다. 정 전 장관은 어머니 손때가 묻은 ‘싱거(Singer)’ 재봉틀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제가 경북고에 입학한 뒤 자식들 학비 부담이 매우 컸어요. 어머니가 아랫방에서 하숙을 치고 삯바느질, 미군 빨래까지 안 한 일이 없었죠.”

정 위원은 거친 어머니의 손발을 기억했다. “발재봉틀을 오랫동안 돌리다 보니 발에 늘 티눈이 있었어요. 저는 재봉틀로 장난치다 실을 엉뚱하게 끼어놓곤 했죠. 어머니가 계주를 많이 하셔서 곗돈 계산도 많이 해드렸고요.” 그때의 경험이 훗날 ‘걸어 다니는 예산 백과사전’이란 별명으로 이어졌을까. 옛 경제기획원과 기획예산처에서 차관까지 지낸 그는 이제 나라의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금통위원이 됐다.

정 전 장관이 학교 다닐 때 열 살 이상 아래인 정 전 원장과 정 위원은 철부지였다. 장남으로서 동생들 뒤치닥꺼리가 걱정이었지만 어머니는 “넌 공부만 열심히 해라”고 했다. “부모님 바쁘실 때 어린 동생들 업어주는 정도였죠.”(정 전 장관) 그러자 익살 섞인 동생의 한 마디가 돌아왔다. “어려서인지 업힌 기억이 안 나요.”(정 위원)

확실히 경상도 남자들의 형제애는 곰살맞은 것과는 멀었다. 이래라 저래라 서로 잔소리하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위에서 모범을 보이면 밑에서 따라갔다. 정 전 장관은 195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장남이 대구를 떠나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어요.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죠.”(정 전 장관)”

그런 아버지도 생전 안 하던 아들 자랑을 한 번 했다고 한다. 1958년 여름 정 전 장관이 행시와 사시에 합격했을 때다. 교실 칠판에 ‘돈아(豚兒·자기 아들을 낮춰 부르는 말)’라고 크게 쓰고 학생들이 뜻을 묻자 “돈아가 고시에 합격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 전 원장은 모범생이었던 형과 달리 밖에서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역시 학창시절 수업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위에서 잘하니까 나도 잘 안 하면 안 되는 거죠. 그게 돌아보면 집안의 전통인 것 같아요. 맨날 야구하고 테니스 치러 돌아다니다가도 시험 때가 되면 무섭게 준비했죠.”

그 기간 정 전 장관은 대구지검 등을 거쳐 1968년 서울지검에 근무하며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동생들은 결혼하기 전까지 형 집에서 같이 살았다. “대학원 석사 다니며 늦게까지 공부할 때이니 형님에게 괴로움을 많이 드렸죠.”(정 위원)

그 뒤 형제들은 제각기 길을 개척했다. 장남은 일찍 사회에 나와 법무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올랐다. 외환은행에 입행한 정 전 원장은 35살에 늦깎이 경제학 연구를 시작했다. 정 위원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경제관료가 됐다. 함께 서울에 있으면서도 얼굴 한번 보기 힘든 바쁜 날들이었다.

한국사회에서 혈연은 중요하다. 일찍 사회에 진출한 장남이 동생들에게 나름 디딤돌이 됐을까. 뜻밖에 정 전 장관은 “서로 계통이 다르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동생들이 어느 정도 입지에 올랐을 때 난 이미 관직을 그만둔 상태였어요. 도와줄 기회가 없었죠.”

동생들도 아쉬울 게 전혀 없다는 표정이었다. “형에게 기대서 뭘 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안 해봤어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으니

진했죠.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뭐 전혀 불만이 없었습니다.”(정 전 원장) “우리 집안이 그래요. 각자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죠. 형님한테 이런 저런 부탁하면 형님도 못해줘서 괴로웠지 않았을까요.”(정 위원)

각자의 길 위에서 분주했던 칠남매가 하나로 뭉친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쓴 글과 일대기를 담아 추모 문집을 낸 것이다. 2004년 일이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5년이 지났을 때였다.

“공직에서 물러나 종중 회장을 맡으면서 뒤늦게 철이 들었어요. 때맞춰 제사 지내고 성묘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돌아가신 어른에게 해야 할 도리를 못하고 허송세월했던 거죠.”(정 전 장관)

아버지를 기억하는 지인과 후배들, 제자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를 포함한 두 분의 일대기는 정 전 장관이 직접 집필했고 남매들도 추모의 글을 저마다 보탰다. 책이 나오기까지 2년이 걸렸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저희는 비교적 순탄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부모님은 희생만 하다 일찍 돌아가셨죠. 아버지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거의 하지 않으셨어요. 단지 모범을 보이셨을 뿐이죠.”(정 전 원장) 아버지는 사람의 삶을 거

(있어서는 안 될 사람), 개미(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꿀벌(꼭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나누고 꿀벌처럼 살자고 했단다.

아버지와 자식 간 분위기는 대를 이어가는 것 같다고 형제들은 털어놨다. “추억을 떠올리다 보면 저 역시 예전 아버지를 많이 닮았을 거란 생각을 해요. 부자간에 무의식적으로 배운 게 있는 거죠. 제 자식들은 대화가 부족해서 불만이라고 하더군요.”(정 전 장관)

세월호 참사 얘기가 나왔다. 다들 숙연한 표정이었다.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불신이 너무 커진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 정 위원이 걱정을 담은 한마디를 꺼냈다. “사회가 급속히 발전했는데 여전히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다고 할까요.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불신이 쌓인 겁니다.”

정 전 원장은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한국에선 내가 이익을 얻으려면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가르쳐요. 집에 전화가 오면 부모들이 ‘나 없다고 해라’고 자식들에게 거짓말을 시키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깨야 합니다.”

정 전 장관은 조금 멀리서 지켜보는 게 때로는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 보니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더군요. 사고가 나면 대책을 확실하게 세우면 되지, 완전히 좌절에 빠져 있을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일을 조용히 잘 해나갈 수 있죠.”

변화는 결국 청년들이 만들어가야 한다고 형제들은 입을 모았다. “하나의 답을 내기 어려운 시대죠. 각자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누구에게 종속될 테니까요.”(정 전 장관) “국내에서 기회를 찾기 어렵다면 해외에서 가능성을 찾는 것도 방법이에요. 부지런하고 똑똑한 한국 젊은이라면 못할 게 없죠.”(정 전 원장) “어떤 일이든 10년 하면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원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삶 그 자체에 가치가 있어요.”(정 위원) 화려하고 특출나지 않지만 소임을 다하는 것, 꿀벌의 지혜가 다시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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