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황혼 열차

입력 2014-10-19 22:30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세계 최고의 호화 열차로 남아공의 블루 트레인을 꼽는다. 케이프타운과 프리토리아 구간 1600㎞를 1박2일간 달리는 이 열차는 욕조 딸린 침실과 식당, 바, 회의실 등을 갖췄다. 창 밖으로 야생동물까지 감상할 수 있어 더 매혹적이다. 객실요금은 2인 기준 330만~360만원으로 비싸다. 그런데 같은 코스를 시속 60㎞로 2박3일 가는 ‘호화 완행 열차’ 로보스 레일도 있다. 요금이나 시설은 비슷한데, 나이 지긋한 황혼 커플들이 주로 이 열차를 좋아한다.

호화 열차의 원조라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다. 1883년부터 시작해 파리~이스탄불을 60여시간 만에 주파하는 이 열차는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1977년 없어졌다가 1982년 런던~파리~베니스(1박2일), 방콕~쿠알라룸푸르~싱가포르(3박4일) 등 6개 구간이 되살아났다. 파리~이스탄불(5박6일)은 2400만원부터 시작한다. 역시 세련된 은발 고객이 많이 찾는다.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인도의 ‘궁전 열차’ 마하라자스 익스프레스, 스위스의 빙하 특급 글레이셔 익스프레스, 노르웨이의 플롬 산악열차, 페루의 마추픽추행 열차 등도 유명하다.

최근 일본에서는 나나쓰보시(7星)가 인기를 끌고 있다. JR규슈가 작년 10월부터 규슈지방 7개 현에 운행하는데 2인 요금이 1박2일 42만~62만엔(약 420만~620만원), 3박4일 96만~150만엔(약 960만~1500만원)이다. 그런데도 예약 경쟁률이 평균 37 대 1에 이른다. 탈락자의 불만을 줄이려고 자주 신청할수록 확률이 높아지도록 추첨방식까지 바꿨다. ‘북두칠성(나나쓰보시)이 JR규슈의 구세주로 떠올랐다’는 말이 실감난다.

지난 1년간 이용자 2600명의 평균 연령은 65세. 고도성장을 이끈 단카이(베이비붐) 세대가 황혼기의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 것이다. ‘여행 길(root) 위에선 누구나 18세(age)’라는 JR의 광고 문구처럼 이들의 표정은 청춘처럼 설렌다. 얼굴에 핀 검버섯까지 밝으레해 보인다.

물론 한국에도 호텔식 관광 열차 해랑이 있다. 남해안의 S-트레인, 중부내륙 O-트레인, 휴전선 DMZ트레인, 경북 순환 테마열차, 충북 영동의 와인열차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대부분이 ‘젊은 열차’다. 딱히 비싼 외국 방식을 모방하자는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이젠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노년의 황혼 열차를 가질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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