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 "경제관료 30년 만에 얻은 결론…시장 통제 하지말고 그냥 놔둬라"

입력 2015-06-04 20:37   수정 2015-06-05 05:11

"학창시절 소설·역사책 읽던 책벌레
친구들 '공부 안하고 장관 됐냐' 놀라"



[ 강현우 기자 ] 수재보다는 책벌레
공직자 되려 법대 진학 결심
성적 올리는데 독서가 큰 도움
법학보다는 경제학 적성 맞아
대학 4학년 한 번에 고시 합격

시장경제 전도사 변신
힘 있는 부처 대신 경제기획원 지원
공무원학원 강사로 생활비 벌기도
정부, 시장경제 통제하면 안돼
기업 성장해야 복지·고용문제 해결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73)은 경기중·고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4학년 때인 26세에 한 번에 행정고시 재경직에 합격했다. “수재(秀才)라는 얘길 많이 들으셨겠다”고 물으니 김 회장은 대번에 손을 내저었다.

“학창시절엔 성적이 나빴어요. 클래식 음악에도 푹 빠졌었죠. 와인도 아주 좋아합니다. 모범생하곤 거리가 멀어요.”

한경과 ‘맛있는 만남’ 장소로 중국음식점인 차이797을 고른 이유도 와인과 잘 어울??요리를 내놓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회장이 음식과 함께 즐기기 위해 가져온 와인은 칠레 콘차이토로 와이너리가 프랑스 로쉴드와 합작해 만든 레드와인 테루뇨 카르메네르. 김 회장은 “향이 은근해 다양한 재료를 쓰는 중국요리와 잘 맞는다”며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건배를 제의했다. 30년 경력 경제관료 출신과의 딱딱한 ‘강의식’ 저녁 식사가 될 것이란 예상이 처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매일 두 권씩 책을 읽던 책벌레

차이797은 에너지 기업으로 알려진 삼천리그룹에서 운영하는 중식당이다. 김 회장은 “특별한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저도 처음 먹어보는 가장 좋은 코스로 골랐다”고 말했다. 코스 이름은 도리상영(倒履相迎·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갈 정도로 반갑게 손님을 맞이함)이었다.

새우 편육 해파리 등으로 구성된 냉채 요리를 먹으며 김 회장의 학창시절 얘기를 들었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었죠. 대신동에 있는 대신초등학교를 나왔어요. 같은 학년에서 서울 경기중학교를 간 건 저뿐이었습니다. 중학교에 가서 초등학교에도 학벌이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덕수초등학교 같은 곳에선 경기중에 20명 넘게 오더라고요. 주눅도 좀 들고 성적도 신통찮아서 책만 죽어라고 읽었습니다.”

서대문구 북아현동 하숙집에서 종로구 화동 경기중까지 한 시간씩 걸어서 통학했던 그는 매일 통학로 중간에 있는 책방에 들러 책을 한 권씩 빌렸다. “아침에 빌린 책을 수업시간에 무릎에 놓고 하교할 때까지 다 읽었어요. 집에 가는 길에 반납하면서 다른 책을 빌려 집에서 다 읽고 다음날 아침에 새로 또 빌렸죠. 역사책이든 소설이든 가리지 않고 읽었어요. 지금도 동창들을 만나면 ‘공부는 안 하고 책만 읽던 친구가 어떻게 장관까지 했느냐’고 해요.”

차이797의 대표 메뉴라는 딤섬이 나왔다. 탱탱한 만두피를 살짝 씹으니 새우와 돼지고기로 우려낸 육즙이 흘러나왔다.

“공적인 일을 하자” 법대 진학 결심

고3이 된 김 회장은 법대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꼭 법관이 되겠다기보다 공적인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버님은 목사로서 기독교사회운동을 하셨고 어머님이 경상남도청에서 공무원을 하면서 가계를 책임지셨어요. 당시 여성으로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부녀계장까지 하셨죠. 어머님을 보면서 공적인 일을 하면 나라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회장은 책 보는 걸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했다. 매달 보는 실력고사에서 등수가 쭉쭉 올라갔다. “책을 많이 본 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서울대 법대를 자신있게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죠. 다행히 운이 좋아 턱걸이했습니다.”

전복찜과 해삼튀김을 맛볼 차례다. 레드와인은 통상 육류에 어울린다고 하지만 김 회장이 추천한 테루뇨는 해산물과도 궁합이 잘 맞았다. 전복과 와인 모두 향이 더욱 풍부해졌다.

대학에 진학한 김 회장은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일단 군대부터 해결하는 게 인생 설계에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복학하고 나니 동기 대부분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며 고시원이나 절로 떠나 있었다. “그때 방황을 좀 했습니다. 법학은 재미가 없었죠. 그러다 경제학 책을 보니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요.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영어로 된 경제학 원서를 사서 공부했죠. 유학을 가기엔 집안 형편이 안 돼 고민하다 공무원이 돼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직해서 돈도 벌고 나중에 해외로 나갈 기회도 있으니까요.”

“크게 생각하자” 경제기획원 지원

대학교 졸업반인 1966년 행정고시 4회 재경직에 합격했다. 당시 가장 인기있는 부처는 재무부와 국세청이었지만 김 회장은 경제기획원에 손을 들었다.

“당시 재무부 파워가 막강했죠. 하지만 저는 힘쓰는 자리보다 크게 볼 수 있는 일이 하고 싶었어요. 덕분에 집안 살림은 어려웠죠. 주말에 종로 학원가에서 공무원시험 강사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아내가 맞벌이를 하면서 도움을 줬고요.”

홍콩식 소프트크랩 튀김이 나오자 잠시 대화가 끊겼다. 껍질이 연해서 씹어먹을 수 있는 게를 커리 등 각종 향신료를 곁들여 튀겨낸 요리다. 얘기를 많이 하느라 다른 음식은 남겼던 김 회장도 소프트크랩 접시는 깨끗이 비웠다. 결혼 얘기로 화제가 이어졌다.

“예전엔 아내에 대해 많이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연상이거든요. 결혼할 때만 해도 연상연하 커플이 드문 시절이었죠. 사무관 때 허리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계속 눈에 띄는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퇴원하고 데이트 신청을 했죠. 4년간 연애한 뒤 결혼했습니다. 제가 차남인데도 아내는 결혼 이후 36년간 시부모님을 모셨어요. 살아볼수록 결혼 참 잘했다는 생각?듭니다.”

“공무원을 해임할 땐 이유를 밝혀야”

스님이 향기에 이끌려 담을 넘는다는 불도장(佛跳牆)이 마지막 요리로 나왔다. 상어 지느러미와 전복, 죽순 등 30여가지 재료를 푹 삶은 맑은 국물이 앞서 나왔던 요리들의 느끼함을 단번에 잡아줬다.

김 회장은 공무원 시절을 회상하면서 사표(辭表) 얘기를 꺼냈다. 국가와 국민에 책임을 지는 공무원이 사표를 쓸 때는 이유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1989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에서 차관보로 승진할 때였습니다. 차관보는 별정직이어서 사표를 쓰고 새로 임명되죠. 인사과에서 사표를 받으면서 ‘일신상 사정’이라고 쓰라는 겁니다. 저는 ‘정부 인사 방침에 따라 사표를 쓴다’고 했어요. 이후에도 사표를 두 번 더 썼는데 모두 명확하게 사유를 밝혔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사권자가 장관 등 주요 공무원을 해임할 때도 이유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회장은 환경처 차관, 소비자원장, 철도청장, 공정거래위원장 등을 거친 뒤 1997년 2월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그해 10월 사표를 쓰고 30여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당시 외환위기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혐의로 구속도 됐지만 결국 무죄로 판명났습니다. 1심부터 무죄였어요. 형사 처벌을 받으려면 국가 경제를 나쁜 쪽으로 몰고가려 했다는 고의(故意)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와 당시 경제팀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환위기가 그런 식으로 발발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

“경제는 시장에 맡기는 게 답”

김 회장은 이후 시장경제연구원을 개원하고 시장경제 전도사로 변신했다. 그의 개인 홈페이지(www.ihkim.org)에 걸린 문패도 ‘시장경제로의 귀환’이다.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을 4년 했습니다. 그 전에는 원가조사과장도 했고요. 하지만 해보고 나니 정부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장에 맡기는 게 답이에요. 하지만 시장이 완전한 건 아니니까 정부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정확하게 결정하도록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이죠. 무조건적인 통제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대형마트를 일요일에 문 닫도록 하는 건 어린애도 할 수 있는 발상이에요.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전통시장에 가도록 하는 게 정부의 역할입니다.”


■김인호 회장의 단골집 차이797
다양한 中광둥식 딤섬 … 50여종 와인도 일품

차이797은 서울 방배동 본점, 수하동 청계천점과 한남동 이태원점 등 수도권에 5개 점포가 있는 광둥식 중국음식점이다. 본점은 2008년, 이번 ‘맛있는 만남’이 이뤄진 청계천점?2011년에 열었다. 삼천리그룹의 생활문화사업 계열사인 SL&C에서 운영한다.

지점마다 메뉴와 가격이 다르다. 청계천점은 3만9000~4만9000원의 점심 코스, 4만9000~11만9000원의 저녁 코스와 다양한 단품 메뉴가 있다. 토·일요일을 포함해 공휴일에는 딤섬 브런치 메뉴(2만2000~2만9000원)를 제공한다. 오향치킨애플샐러드(2만5000원), 호두꿀크림중새우(4만3000원), 레몬깐풍기(2만8000원) 등 독특한 퓨전 메뉴도 있다.

통새우와 다진 새우살, 부추로 풍미를 돋운 새우부추딤섬(4개 8000원), 만두피를 살짝 찢으면 진하고 담백한 육수가 배어나오는 샤오룽바오(4개 8500원) 등 딤섬 메뉴가 다양하다. 50여종의 세계 각국 와인을 갖추고 요리에 맞는 와인을 추천해준다. (02)6030-8972~3

■김인호회장의 시장경제우선론

김인호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한국 경제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기업에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이 성장해야 고용과 복지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선 기업가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진단이다. 김 회장은 “기업가 정신을 발현하기 위해선 정부가 먼저 예측 가능한 경제 환경을 만들고 시장 원리가 모든 경제 부문에서 일관적으로 작동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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