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대오각성…'병자'서 '강자'로 부활한 독일

입력 2015-12-31 16:40   수정 2016-01-01 08:49

대사들의 특별 리포트…위기를 희망으로 바꾼 나라들 (1) 이경수 주 독일대사

"좌파정부가 시작한 노동개혁, 우파정부가 일관되게 추진"

여야 정치색 달라도 노동개혁 한 목소리
대화·타협 통해 개혁정책 일관되게 추구
파견규제 강화 등 보완조치로 계속 진화

슈뢰더 "개혁은 인기 없지만 반드시 필요…선거 패하더라도 국가 장래 위해 결단"



1999년 6월 발간된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을 ‘유럽의 병자’라고 썼다. 그럴 만도 했다. 1990년대 독일은 높은 실업률과 수출 부진, 노동시장 경직과 유로화 출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저성장 위기에 빠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과도한 사회보장비 부담과 함께 통일비용 지출까지 겹쳐 재정 악화 등 심각한 어려움이 계속됐다. 독일의 관대한 실업급여제도는 노동자의 근로의욕을 떨어뜨렸고 노동시장 경직성은 기업 투자와 고용 유인을 약화시키는 심각한 장애요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독일 정부가 내린 처방이 ‘하르츠 개혁’으로 불리는 노동개혁이었다.

2002년 재임에 성공한 사회민주당(SPD)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2003년 3월 사?middot;경제 부문의 광범위한 개혁조치인 ‘아젠다 2010’을 내세우며 노동시장 개혁, 복지체제 전환, 경제성장 촉진이라는 3대 목표를 제시했다. 이 중에서도 페터 하르츠 노동시장현대화위원회 위원장의 이름을 딴 하르츠 개혁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취한 개혁조치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고 과감했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특징으로 하는 하르츠 개혁의 핵심은 정리해고 요건 완화, 실업수당 삭감, 시간제 일자리 확대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 지원 강화, 실업자에 대한 고용훈련 및 취업 제의 조치 등도 병행됐다.

하르츠 개혁 하에서 독일 정부는 부당해고 금지규정 적용을 완화했고 적용 범위를 기존 5인 이상에서 10인 이상 사업장으로 좁혔다. 또 ‘미니 잡’ 등 시간제 고용을 확대했고, 이로 인해 발생한 고용주의 사회부담금을 감면하는 조치도 시행했다. 실업자 직업알선 및 훈련을 강화하고 실업자에게 정부의 취업 제의 또는 고용훈련 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선택하도록 했다. 실업자가 정부의 적절한 제의를 계속 거부하면 실업급여가 점차 줄어 전액 삭감까지 가능한 강도 높은 조치도 내놨다.

이는 단지 실업률 감소라는 직접적 효과뿐만 아니라 “지원하되 (일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회복지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장기 실업자를 고용하면 고용주에게 임금도 일부 지원했다. 1인 기업 창업도 확대했다.

동시에 퇴직연금보험 수령연령의 상향 조정, 기본실업급여 지급기간 단축 등 실업급여 수혜 요건을 강화해 만성적인 장기실업문제 해결을 도모했다.

노·사·정 협력 파트너십과 상생 정신

개혁 초기 노조는 비정규직 고용규제 완화 및 시간제 일자리 확대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개혁 입안자인 페터 하르츠 회고에 따르면 노조 역시 고용 보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노동시장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독일에서는 노동시장 경직화 부작용이 커지면서 독일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고 있었다. 이는 독일 내 일자리 감소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노조로서도 임금 인상 또는 근로시간 축소가 아닌 고용 보장에 최우선을 둬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조는 결국 노사 고통 분담을 통한 상생의 길을 택했다. 노조는 임금을 동결하고 근로시간 연장을 수락하는 대신 사용자는 일자리를 보장하는 데 합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독일 정부와 산업계가 고용 유지를 위한 단축근무제를 도입해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일자리를 보전해 주었다.

정부는 단축근무로 인한 임금 감소분 보전 및 교육훈련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해고나 일자리 폐지 없이 고용을 유지하면서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기업은 성장과 고용 안정을 도모하고, 노조는 임금 인상 자제와 경영 안정에 협조하고, 정부는 이에 수반되는 적극적 아이디어와 재정 지원으로 공생적 노·사·정 문화를 구축해 나갔다.

씨 뿌린 슈뢰더, 열매 맺은 메르켈

슈뢰더 전 총리는 소신 있는 사회경제 개혁 추진으로 독일 경제회복의 기수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회복지 축소와 불공정한 소득분배를 초래했다는 비판 속에 2005년 7월 조기 퇴진이라는 정치적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슈뢰더에 이어 집권한 중도離?성향의 기독교민주당(CDU) 메르켈 총리는 슈뢰더 정권 퇴진의 단초가 됐던 하르츠 개혁을 계속 추진했다. 기민당으로서는 만성적 실업과 고실업 상태가 경쟁과 성장보다는 형평과 분배, 노동권과 복지에 치중한 결과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경제회복을 위해서는 노동개혁 이외 대안은 없다는 점에 의심이 없었다. 메르켈 정부는 하르츠 개혁을 시작한 좌파성향 사민당과 좌우대연정을 출범시켰다.

개혁 성과는 2005년께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2006년에는 경제성장 및 수출이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이 유럽 경제의 병자에서 성장동력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독일 성장률은 유로지역 평균치를 웃돌고 있다. 한때 12%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6% 선에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독일은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유일하게 글로벌 금융위기 기간 중 실업률이 감소한 국가다. 유로존 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용시장의 안정성을 견고히 유지하고 있다.

필자는 작년 5월 슈뢰더 전 총리를 면담하고 하르츠 개혁에 대한 그의 소회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개혁이 정치적으로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국가의 장래를 위해 이를 관철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개혁정책에 변함없는 소신을 보여주었다.

하르츠 개혁은 최근 메르켈 총리의 법정 최저임금제 도입, 파견규제 강화 등 보완조치를 거쳐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 기저에는 정파를 뛰어넘는 국가비전과 정치 지도자들의 신념, 타협과 공존의 정치 문화와 정책의 일관성 추구라는 독일의 전통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C?개혁 “용기있는 결단”

하르츠 개혁이 독일 경제성장의 동력이 됐다는 견해가 다수지만, 비정규직 양산으로 인한 고용 불안 및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 양극화라는 부작용을 수반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노동자만 희생시키고 장기적 성장기반인 기업의 혁신 의지를 오히려 감퇴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재 시점에서 하르츠 개혁에 대한 완벽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용기 있는 지도자가 위기극복의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공생의 사회경제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하르츠 개혁은 분명히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할 만하다. 위기상황에서 노동시장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유연하고 합리적인 구조로 전환하지 않았다면 독일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은 어려웠을 것이다. 100여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이고 구조개혁만이 살길이라는 원칙으로 그리스의 이탈을 막아 유로존을 지켜낸 지금의 독일도 없었을 것이다.

독일 특유의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토양에서 태동하고 성숙한 하르츠 개혁이 다른 나라에 그대로 적용돼 같은 성과를 창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르츠 개혁이 일자리 보전과 고용 확대를 이루고, 경제성장 동력을 회복하고, 장기 실직자의 재취업 독려를 통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되찾게 했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 경제가 당면한 현실에 비추어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경수 < 駐독일대사 kslee81@mofa. 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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