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꽃샘추위 물러날 때 보았네…매화의 수줍은 '봄 인사'

입력 2016-03-14 07:10  

섬진강·지리산 자락의 봄 마중

복수초·청노루귀·얼레지·현호색·갯버들…
"눈을 크게 떠 봐" 작고 여린 것부터 봄은 찾아오니

섬진강 봄꽃들의 외출
무릎 꿇고 눈높이 맞추니 봄꽃들 벌써 다정한 어깨동무
5월까지 매화·벚꽃축제 이어져

환상의 '힐링 로드'
지리산 옛길 등 트레킹족 유혹
861번 지방도로·17번 국도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




섬진강 매화가 피니 마침내 봄이다. 지난 1월부터 깊은 골짜기의 복수초가 눈 속에서 황금 술잔을 내밀더니 변산바람꽃이 뒤를 이었다. 노루귀며 너도바람꽃도 피었다. 봄의 기적 소리는 빛깔이며 향기이자 촉감이다. 해마다 봄기운이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강변에 나아가 갯버들과 그 너머의 물빛과 물비늘(윤슬)을 바라보았다. “나도 꽃이다!”라고 소리치는 섬진강 갯버들, 버들강아지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갯버들 수꽃들의 화려한 외출이 시작돼야 황어 떼가 오르고 만화방창한 섬진강의 봄이 온다.

삶이 늘 그렇듯이 갈 수 있을 때 가고, 볼 수 있을 때 보아야 한다. 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 자세히 보니 강변 양지바른 곳에는 봄까치, 광대나물, 별꽃들이 피어 있다. 봄은 이렇게 아주 낮고 작고 여려서 잘 안 보이는 것들로부터 오고 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겨울의 결기 끝에 ‘여럿이 낮고 다정한’ 어깨동무를 하는 것이다.


‘봄의 행동대장’ 섬진강 황어

봄은 전방위적으로 온다. 고로쇠 수액처럼 수직으로 오르기도 하고, 매화나무 아래 키 낮은 봄까치 꽃처럼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쉬기도 하면서 아주 조금씩 고도를 높이며 북상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봄은 강물 속으로도 온다. 남해에서부터 섬진강을 따라 힘차게 올라온 황어 떼가 강변의 매화 꽃망울들을 터뜨리며 역류하고 있다.

진정한 ‘봄의 전령’은 섬진강 황어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황어는 은어나 연어처럼 바닷물과 민물을 오가는 회유성 물고기다. 길이 15~30㎝인 황어는 봄철 산란기에 바다에서 하천으로 오르는데, 등쪽은 약간 푸른색을 띤 연한 갈색에 가깝고 배쪽은 약간 노란색을 띤 은백색에 가깝다. 특히 주황색 세로줄무늬가 2~3개 정도 나있어 이름이 황어인데 수컷의 색이 더 진하다.

알을 밴 이 물고기가 아직 차가운 물속으로 힘차게 꼬리를 치며 올라야 비로소 매화와 강변의 봄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남해에서 섬진강으로 거슬러 오르는 황어야말로 배 속에 수천 수만의 알을 품고 허위허위 온몸으로 봄을 끌어올리는 ‘행동대장’이다. 황어 없이는 섬진강의 봄도 없다. 이와 더불어 섬진강과 지리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몸속에도 고로쇠나무 수액처럼 봄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3월부터 5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봄꽃 축제

봄꽃 축제는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두 달 동안 이어진다. 올해는 전남 지역에서 제19회 광양매화축제(3월18~27일)와 제17회 구례산수유꽃축제(19~27일)가 같은 시기에 열린다. 곧이어 경남 하동에서 제21회 화개장터벚꽃축제가 4월1~3일 ‘쌍계사 십리 벚꽃길’과 화개장터 영호남 화합 다목적광장 일원에서 열린다.

마치 꿈길 같은 이 길은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를 한다고 해서 ‘혼례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같은 시기에 구례군 문척면 섬진강변에서도 섬진강벚꽃축제(4월2~3일)가 열리는데, 인근의 오산 사성암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천하제일이 아닐 수 없다.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내려다보며 한국 풍수의 방점을 찍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로 ‘섬진강과 지리산의 조망 1번지’다운 곳이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남한 3대 명당’의 하나라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의 운조루(雲鳥樓)가 한눈에 들어온다.

축제 시즌에 오려면 교통 혼잡에 유의해야 한다. 주말 낮 시간대인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사이에는 차가 많이 밀리니 되도록이면 평일이나 주말의 이른 아침 혹은 밤에 도착하는 게 좋다. 어쩌다 초봄의 축제를 놓쳤다고 아쉬워할 것은 없다. 축제는 ‘하동 야생차문화축제’(5월19~22일), 전북 남원의 ‘춘향제’(5월13~16일)와 운봉의 ‘바래봉철쭉제’까지 정신없이 이어진다.


‘섬진강 길’ 등 힐링 코스 곳곳에

최근에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길로는 ‘섬진강 길’과 ‘지리산 옛길’, 그리고 섬진강을 따라 이어진 자전거도로 등이 있다. 지리산 둘레길의 구례~하동 구간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사실 일부 구간은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걸어야 하는 곳이 많다. 많은 시간을 들여 지리산 둘레길 전체를 다 걸어볼 계획이 아니라면 일단 잠시 접어두는 것이 좋다.

이 봄날에 섬진강과 지리산의 봄을 만끽하려면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를 따라 강물처럼 흘러갈 것을 추천한다.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섬진강을 따라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을 거쳐 하동읍 송림 백사장과 남해 바다까지 이어지는 이 섬진강 100리 길은 말 그대로 ‘힐링 코스’다. 매화꽃, 배꽃, 벚꽃 등이 번갈아 피어나는 이 길은 섬진강 특유의 넓은 모래사장과 녹차밭, 대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너무 많이 걷지 않을 사람은 악양면 평사리공원 백사장과 화개장터 구간을 편도로 걷거나 왕복해도 좋다. 천천히 걸어도 편도 두세 시간, 왕복 여섯 시간 정도 걸린다. 아주 가까이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과 평사리 들녘의 부부소나무가 있다.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신흥교에서 의신마을까지 이어진 ‘지리산 옛길’ 또한 너무나 멋지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리산에 입산하면서 ‘저잣거리에서 더러워진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에서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한 마리 보리은어처럼 벽소령으로 거슬러 오르는 명품 길이다. 서산대사가 출가하던 길이라 해서 일명 ‘서산대사길’이라고도 한다. 편도 4.2㎞의 그리 길지 않은 옛길을 잘 이어놓았다. 내내 계곡 물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고운 선생처럼 내내 귀를 씻을 수 있다.


환상의 드라이브코스 861번 지방도

드라이브 코스로는 전남 곡성의 기차마을에서 구례까지, 그리고 하동을 지나 남해까지 이어지는 섬진강변 17번, 19번 국도가 단연 돋보인다. 더 한적하면서 아름다운 길도 있다. 바로 861번 지방도로다. 바다와 강과 들판과 산과 계곡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다압면의 섬진마을과 구례군의 간전면~문척면까지, 그리고 구례읍~광의면의 너른 들녘과 해발 1100고지의 지리산 성삼재를 넘어 달궁~뱀사골계곡을 지나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실상사 인근까지 이어지는 90㎞ 정도의 비교적 짧은 길이다. 섬진강 물길 100리와 지리산 산길 100리로 이뤄진 이 길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한몸으로 만나고, 섬진강 하구와 남해안 광양만의 포구가 어우러지면서 한반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19번 국도?861번 지방도로가 100리 길을 마주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피안(彼岸)의 세계로 존재하기에 비로소 계절마다 암수 한몸의 꽃길과 물길이 되는 것이다. 다만 19번 국도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길’로 명명됐지만 차량의 폭주로 인해 자전거를 타거나 걷기에는 매우 위험하다. 이 길을 사랑하는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차선 확장 포장 사업이 강행되는 바람에 공사 중인 구간이 많다. 반면 매화와 벚꽃이 피어나는 861번 지방도는 비교적 한가한 데다 섬진강과 지리산을 바라보며 드라이브하기에 더없이 좋다. 861번 지방도를 따라 섬진강 자전거도로도 잘 이어져 있다.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

지리산은 그 둘레만 해도 850리가 되는 ‘어머니의 산’답게 그 너른 품에 기대어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좁게 봐도 3개 도, 5개 시·군, 12개 면으로 연결돼 있으니 원주민을 비롯해 귀농·귀촌한 사람들이 참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날마다 등산이 아니라 입산할 때마다 떠오르는 당대의 큰 어른들이 있다. 지리산 최초의 산악회 ‘연하반’의 우종수·함태식 선생과 쌍계사 위 불일평전의 변규화 선생, 그리고 우천 허만수 선생이다. 허만수 선생은 이미 오래전에 심심산중으로 사라지고, 변규화 선생마저 그 자리에서 지리산 흙이 되고 말았다. 노고단산장과 피아골산장에서 40여년의 산장지기였던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 선생도 여든 살?넘기며 하산한 뒤 먼길을 떠났고, 우종수 선생도 아들인 구례문화원장 우두성 씨의 얼굴을 아주 잠깐씩 알아볼 정도로 쇠약해지다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요즘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단연 주목을 받는 곳은 구례다. 이미 20년 전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의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 등이 농장공동체와 대안학교, 생명평화 운동 등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경남 산청에서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와 공동체마을인 안솔기마을의 최세현 씨 등이 자리를 잡았다.

국립극단 수석배우 출신인 이상직 씨의 군립극단 ‘마을’ 창단, 토지면을 중심으로 농민들과 함께하는 ‘지리산닷컴’의 활동이 눈에 띈다. 그리고 ‘지리산학교 구례’ 개교, 동편제 소리꾼 명창부부인 김소현·박정선 씨의 섬진강 판소리학교와 한국판소리문화재단,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인 ‘지리산 사람들’, 지리산행복학교 지리산걷기반 교사인 임현수 씨가 주도하는 ‘공정여행’ 등의 모임이 ‘따로 또 같이’ 그 바람의 주역들이다. 광의면에 화가마을이 조성되는가 하면 문인들도 여러 명 들어왔다. 박두규 시인이 섬진강변에 집을 짓고, 소설가 한상준 씨가 동해마을 산중에 토방 집필실을 지었다. 소설가 이성아 씨와 시인 김해화·김인호·송태웅 씨 등도 둥지를 틀었다.

돈 없이 잘 노는 ‘지리산 행복학교’

2009년에 처음 문을 연 ‘지리산학교’는 현재 3개의 閨낮?분화·발전했다. 처음 만든 하동군 악양면의 지리산학교에는 사진작가 이창수, 시인 박남준, 여성산악인 남난희 씨 등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전국 단위의 지리산 행복학교는 돈 없이 잘 놀며 모여서 공부하는 어른들의 문화예술 대안학교다. ‘고알피엠 여사’ 신희지 씨가 교무처장을 맡고, 원주민 총각 이장인 김태종 씨가 교무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선생으로는 문예창작반을 맡고 있는 나를 비롯해 우두성 구례문화원장, 섬진강걷기반의 김인호 시인, 우리차만들기반의 조연옥 씨, 아웃도어반의 하동펜션협회장 이상주 씨, 남원 운봉 출신의 화가 오치근 씨, 목공예반의 최명철 씨, 커피반의 배종숙 씨, 전통요리반 장숙남 씨 등이 재능 기부로 참여하고 있다. 지리산학교 구례는 시인 박두규 씨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지리산에는 원주민과 더불어 도인을 꿈꾸는 사람, 도시에서 암 등의 병을 얻고 치유의 길을 걷는 사람 등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다만 그동안 지켜본 바에 따르면 지리산에 살면서도 지리산과 섬진강의 넉넉한 품과 지혜를 배우고 행하지 않으면, 그 어디에 살아도 이미 ‘지리산 사람’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꽃의 속도로 봄마중 나가자

꽃샘추위에 잠시 멈칫하던 섬진강 매화꽃들이 다시 화르르 피어나고 있다. 하지만 날이 따스해지니 그저 외투를 벗고, 꽃이 피었으니 꽃구경이나 가야겠다는 자세로는 일평생 봄을 온전히 모실 수 없다. 먼저 오는 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잠시라도 승용차를 세워두고, 하루 종일 꽃이 피는 속도로 걸어서 봄마중을 나가야 한다.

북상하는 꽃의 속도는 가을에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와 비슷한데 이마저 날씨에 따라 날마다 다르다. 꽃샘추위가 몰려오면 매화며 산수유 꽃들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춘다. 날씨가 좋으면 하루 백 리 길도 달려가는 꽃의 속도이지만 문득 멈출 줄도 아는 것이다.

대개 봄꽃들이 하루에 오십 리 길을 북상하니 우리는 그 반대로 하루 오십 리 길을 걸어서 남쪽으로 봄마중을 나가면 된다. 아직 피지 않은 벚나무에 말을 걸고, 곧 먼 길을 떠날 철새들에게 손을 흔들며, 아직은 시린 강물에 두 손을 씻으며 봄을 미리 만날 때인 것이다.

농부나 어부처럼 미리 봄을 살아야만 온몸 그대로 봄이 되고, 내가 먼저 한 송이 풀꽃을 피워야만 비로소 어깨동무가 된다. 이제 우리가 꽃을 피울 차례다. 주저앉아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상처 위에 자꾸 소금만 뿌릴 게 아니라 툭툭 털고 일어나 ‘카르페 디엠,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지금의 매순간에 충실하라’를 되새기며 꽃을 피우고 또 피울 때가 왔다. 내가 먼저 봄이면 송이송이 꽃이 피듯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도 마침내 봄꽃일 것이다.

이원규 시인 jirisanpoe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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