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주의에 빠져 벼랑에 선 한국 조선업, '변경 DNA'를 회복하라

입력 2016-06-06 17:30  

사회평론가 복거일 긴급제언
조선산업, 새 변경을 개척하라 <1부>




한국 조선산업이 위기다. 한국 조선업 호황의 상징이던 ‘말뫼의 눈물’은 ‘울산의 눈물’, ‘거제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돼 위기 상황을 웅변하고 있다. 사회평론가이자 작가인 복거일 씨는 한국 조선산업의 도약과 위기, 재도약의 조건을 꿰뚫는 키워드로 변경정신(frontier spirit)을 제시했다. 1970년대 말 한국과학연구원 선박연구소에서 일했던 복씨는 당시 조선소 직원들은 변경의 DNA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변경정신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관료주의가 꿰차면서 한국 조선산업의 위기가 시작됐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경정신을 찾아야 한다고 복씨는 강조했다.

(1) 변경의 추억
1970년대 막 지어진 조선소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변경 마을처럼 거칠었지만 생기가 넘쳤다

1970년대 말엽 대우조선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컴퓨터로 낡完構?제작하는 기술(CAD/CAM)을 들여와서 조선소들에 보급하고 있었다.

막 지어진 조선소에선 모든 것이 거칠었다. 그래도 그곳엔 어려움이 닥치면 몸으로 부딪쳐 뚫고 나가겠다는 도전정신이 암류처럼 흘렀다. 정주영 회장께서 조선소가 서기도 전에 거북선이 든 500원권을 내밀면서 한국이 옛적부터 배를 잘 만들었다고 얘기하고 자금을 얻고 일감을 따냈다는 일화가 사람들의 의기를 높이던 시절이었다.

조선소 밖 마을까지 그랬다. 모든 것이 임시변통이었지만, 생기가 넘쳤다. 나는 그곳에서 서부 영화에 나오는 변경 마을의 거칠고 들뜬 분위기를 느꼈다. 거나해지자, 대우 사람들에게 감탄 반 충고 반으로 한마디 했다, “대우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거칠어요. 꼭 현대 같아요.” 구매 담당자가 씨익 웃으면서 대꾸했다, “복 선생님, 저희가 어디서 왔습니까?”

그러고 보니, 술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현대에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위의 일화엔 상당한 뜻이 담겼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의 3대 조선소들은 정부의 중화학공업 정책에 따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고 같은 지식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똑같은 기술로 아주 비슷한 배들을 지으면서 동일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이른바 DNA가 같은 분지계(clone)들이다. 그런 사정은 이번 위기에도 깊은 수준에서 작용했다.

(2) 한국 조선업의 미스터리
일본, 조선업 일찍 포기하고
중국은 기술 향상 지지부진할 때
한국 조선업 멀찌감치 나아가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선 일본의 사양산업을 한국이 이어받고 이어 중국이 넘겨받았다. 그러나 일본이 계속 강세를 보이는 산업에선 우리 기업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 고전했다. 이른바 ‘양방 압박(nutcracker)’이다.

이런 패턴에서 조선업은 드문 예외다. 우리 조선소들은 압도적 우세를 지닌 일본의 조선소들을 제치고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누렸다. 기술적으로 가장 앞선 조선소들은 아직도 한국의 ‘빅3’다. 한국 조선소들이 지은 배가 가장 우수하고 중고선 값도 가장 비싸다. 지금 ‘수주 절벽’이라 불리는 현상은 세계적 불황과 유가의 가파른 하락에서 나온 일시적 현상이다.

한국 조선업의 활력은 미스터리다. 일본 정부가 조선업을 사양산업으로 여기고 너무 일찍 포기했다는 사실이 먼저 꼽힌다. 1970년대에 불황이 닥치자, 일본 정부는 건조능력을 10년 동안에 절반으로 줄였다. 이 과정에서 해고가 쉬운 연구와 설계 인력이 많이 줄었고 대학에선 조선과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호황이 닥쳐도, 일본 조선업은 인력 부족으로 힘차게 일어서지 못했다.

반면에 우리 엔지니어들은 우수하다. 조선은 일관 공정이 어렵고 사람과 기계가 함께 일하는 작업이므로, 고급 인력이 특히 중요하다. 조선업이 특수하고 좁은 분야임을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우리 대형 조선소가 고급 선박 시장을 독점한 상황에선 중국 조선소들이 기술 향상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어쨌든 ‘양방 압박’에 끼이기 전에, 우리 조선업은 멀찌감치 나아갔다. 비록 위기를 맞았지만, 한국의 주요 산업들 가운데 조선업이 그래도 전망이 밝은 까닭이 거기 있다.

(3) 한국 조선업의 좌절
노조는 눈앞 이익만 탐하고
단기성과 집착한 경영자들은 준비 없이 플랜트사업 뛰어들어

그러면 잘나가던 우리 조선업이 왜 넘어졌는가? 근본적 요인은 노화다. 외진 바닷가에 조선소를 세우던 초창기의 변경정신은 차츰 사라지고 관료주의가 들어섰다. 노동조합은 점점 강성해져서, 막무가내로 눈앞의 이익만을 탐했다.

조선업은 경기 변동에 유난히 민감하다. 경기가 나빠지면, 교역이 줄어들어 배가 남아돈다. 조선에 대한 수요도 따라서 줄어든다. 2008년의 금융위기 뒤 세계 경제는 크게 위축됐고 경기는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분지계들이므로, 3대 조선소는 이런 어려움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래서 같은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세 조선소 모두 주인이 직접 경영하지 않고 대리인이 경영했다는 사실은 이런 상황을 악화시켰다. 대우는 채권자인 산업은행이 관장하니, 주인이 있을 리 없다. 현대는 사주가 중요한 정치가여서, 전문경영인들이 운영했다. 삼성중공업은 주인이 있었지만, 그룹 핵심 인사들은 미래 수종 사업에 포함되지 못한 중공업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인이 직접 경영하지 않으면, ‘주인-대리인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 문제는 위험에 대한 대응에서 두드러진다. 단기적 성과를 통해서 주인의 평가를 받으므로, 대리인은 당장의 실적에 집착하고 장기적 위험에 대해선 마음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위험 관리는 늘 주인의 몫이다.

새로운 시장이 나타나면, 대리인 경영자는 뛰어들 수밖에 없다. 단기적 성과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데, 장기적 위험을 고려할 사람은 없다. 게다가 경쟁사가 먼저 진출하는 상황은 악몽이다. 잠시 한눈팔다 새로운 시장이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 쫓겨난 창업공신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세 조선소가 거의 동시에 낯설고 위험한 해양 플랜트 사업에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들었다.

(4) 해양플랜트 사업의 특질
리스크 큰 해양플랜트
과당경쟁에 수주가격 하락
발주자 무리한 요구도 받아들여

해양플랜트는 바다에 설치된 구조물이다. 핵심은 해저의 탄화수소(석유와 가스)를 채굴하는 석유 플랫폼(oil platform)인데, 우리 조선소들이 주로 제작한 것은 시추선(drill ship)과 FPSO(floating production storage and offloading)다.

해양 석유채굴 설비는 험난한 조건 속에서 작동한다. 폭풍과 파도에 시달리고 혹한 속에서 작업해야 한다. 석유 유출로 환경 재앙이 일어나고 화재나 폭발의 위험성이 어린다. 석유나 가스가 분출할 때의 거대한 압력을 견뎌야 하고 독한 물질들에 의한 부식을 견뎌야 한다. 즉 모든 것이 거대하고 튼튼하고 내구적이어야 한다. 당연히, 해양플랜트는 선박보다 만들기가 훨씬 어렵다.

근년에는 기술적 어려움에 정치경제적 어려움이 얹혔다. 저개발 산유국들이 자국 산업 육성 정책을 펴면서, 부품 국산화 비율이 높아졌다. 원래 공업이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이므로, 부품을 구할 도리가 없다.

이처럼 어려운 사업에 따르는 갖가지 위험을 힘센 발주자들은 조선소에 모두 떠넘긴다. 발주자의 잘못된 설계를 바꿀 때도, 조선소가 책임을 지게 됐다. 조선소가 아무리 애쓰고 많은 자원을 투입해도, 공정은 마냥 연기되고 인도 시기를 맞추지 못한다. 그러면 혹독한 지체상금이 기다린다.

해양 석유사업은 해저 채굴 설비, 석유 플랫폼 및 연안 시설들이 함께 작동하는 거대한 체계다. 단위 사업 하나가 지체돼도, 온 체계가 멈춘다. 그래서 지체상금이 유난히 무겁다. 반면에, 조선소는 대금을 잘게 나눠 받아서 금융 비용이 선박보다 훨씬 무겁다.

이처럼 해양플랜트는 우리 조선소들로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분야였다. 세 조선소가 실질적으로 분지계들이며 심각한 주인-대리인 문제를 안았다는 사정은 그런 합리적 접근을 어렵게 했다. 중국 조선업의 빠른 성장으로 시장 점유율이 낮아지고 고급 선종들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되자, 세 조선소는 해양 플랜트를 돌파구로 삼았다. 경쟁이 심해지면서, 수주 가격은 점점 내려갔고 발주자들의 무리한 요구도 다 들어주게 됐다.

해양플랜트는 조선보다 전망이 어둡다. 선박에 대한 수요는 경제가 발전하고 교역이 늘면서 꾸준히 늘어난다. 지금 불황이 깊지만, 조만간 선박 수요는 회복될 것이다. 바다에서 어렵게 채굴하므로, 해양 석유는 원가가 높다. 셰일 석유가 경제적이 되고 육지 석유 생산도 크게 늘어난 터라, 해양 석유에 대한 수요는 회복이 더디고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장기적 전망은 더욱 어둡다. 앞으로 셰일 석유와 가스가 점점 경제적이 되고, 태양광 발전과 전기 에너지 저장 기술이 발전하면, 해양 석유의 경제성은 점점 나빠질 것이다. 환경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서 비용이 많이 드는 유전의 개발을 줄이라는 사회적 압력도 빠르게 커진다.

(5) 조선 시장의 전망
해운 경기회복 아직 ‘안갯속’
유가 다시 하락할 가능성도
조선업 내년까지 ‘고난의 汐?rsquo;

조선업의 경기는 해상 물동량과 해양 석유 채굴에 따라 움직인다. 해상 물동량은 세계 경기에 달렸고, 해양 석유 채굴은 석유 가격에 달렸다. 2002년 이후 중국을 비롯한 신흥 대국들의 빠른 경제 성장 덕분에 해상 물동량과 해양 석유 채굴이 함께 늘어났다. 그러나 2008년에 시작된 금융위기로 이런 추세가 크게 꺾였고 조선시장도 크게 위축됐다. 지금 세계 경제는 금융 위기에서 힘겹게 벗어나고 있다. 경기 회복의 속도와 폭에서 결정적 변수는 중국 경제다. 그동안 중국 경제는 안정적으로 움직였으나, 전망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의견 차이가 무척 크다.

석유 가격은 공급이 넘쳐서 아주 낮아졌다가 상당히 회복됐다. 예상보다는 빠르게 안정됐지만, 다시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 석유와 가스에 대한 투자는 차츰 회복하겠지만, 해양 석유에 대한 투자는 미미할 것이다. 해운업은 전망이 밝지 않다. 2006년 이후 선복량 증가율이 해상 물동량 증가율을 상회하다가 2013년 이후 차츰 수렴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종합하면, 조선업은 올해는 무척 어렵고 2017년은 좀 나아질 것 같다. 2018년엔 조선 경기가 상당히 회복하리라는 예측이 나오지만, 중국 경제의 움직임이 불확실성을 키운다. 적어도 두 해는 무척 어려우리라고 보아야 한다.

(6) 구조조정의 기준
근로자들 모두 품고가단 공멸
중요한 건 조선소가 아니라 조선업
경쟁력 최적화해야 후일 기약

어떤 일이든 첫걸음은 추구해야 할 궁극적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궁극적 가치를 가장 크게 늘리는 ‘최적화’는 사람들의 행동을 인도하는 원리를 넘어 세상을 움직이는 기본 원리다. 이번 구조조정의 경우 궁극적 가치로서 먼저 떠오르는 것은 종업원들의 일자리다. 그러나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적자를 보는 기업이 종업원들을 모두 품고 갈 수는 없다. 기업이 망하면, 일자리는 모두 사라진다.

조선소들을 살리는 것은 종업원들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배들이 넘쳐서 모든 조선소를 살릴 수 없으므로, 궁극적 가치를 기업에 둘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조선업이지 개별 조선소가 아니다. 우리 조선업이 생기를 잃지 않고 능력을 보존한다면, 특정 조선소들이 폐쇄되더라도,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즉 구조조정은 우리 조선업의 경쟁력을 최적화하는 방식으로 추진돼야 한다.

우리 조선업의 경쟁력 보존이 궁극적 가치고 이번 위기에 대한 대책은 경쟁력의 최적화라는 사정을 확인하면, 기술의 중요성이 떠오른다. 기술이야 언제 어디서나 결정적 요소지만, ‘양방 압박’으로 어려움을 겪어온 우리로선 민감할 수밖에 없다.

조선업의 위기에 관한 논의는 풍성했지만, 주로 자금을 조달하는 방안을 얘기했다. 자금 조달은 물론 중요하지만, 복잡한 문제는 아니다. 대통령이 결심하고 실무 책임자들이 조율하면, 매듭지을 수 있다. 정작 힘든 것은 중국 조선소의 거대한 압박에 뛰어난 기술로 버텨온 우리 조선소가 경쟁력을 지니면서 고비를 넘길 방안을 찾는 일이다.

(7) 구조조정 대상 기업
여러모로 비슷한 ‘빅3’ 조선소 합쳐봐야 시너지 작고 비효율적
구조조정 대상 대우로 한정해야

며칠 전 현대와 삼성의 자구안을 채권은행들이 받아들였으므로, 3대 조선소가 각자도생하게 됐다. 그동안 국책은행들은 세 조선소를 한데 묶어 처리하려 시도했다.

여러모로 비슷한 세 조선소를 한데 묶어서 처리하려는 충동은 자연스럽지만 비합리적이다. 조건이 좋을 때도, 기업을 합쳐서 성과를 얻는 경우는 드물다. 내력과 인맥과 풍토가 다른 두 집단이 법적으로 합쳐진다고 이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될 수는 없다. 그래서 시너지가 나올 것 같은 합병들도 흔히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처지가 어려운 기업들이 합쳐지면, 두 집단 사이에 생존을 위한 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3대 조선소는 대기업들이라, 합쳐지면 비효율적이 된다. 동질적이라 시너지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대는 우량 기업이다. 다른 두 조선소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재무 구조나 수주 능력도 월등하다. 갑작스럽게 악화된 시장 환경에 적응하면 된다.

삼성도 경쟁력이 있을 뿐 아니라 재무구조도 비교적 튼실하다. 다만 해양 플랜트 부문에서 수주 취소로 일감이 부족해질 수 있고 잔금을 받지 못할 위험도 있다. 그래도 크고 튼튼한 삼성 그룹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므로, 혼자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

반면에 대우는 여러모로 부실하다. 부채가 너무 많고 회계 부정까지 저질러서 재무제표 자체를 믿을 수 없다. 종업원들의 근무 태도도 목불인견이다. 그래서 이번 조선산업의 위기는 실질적으로 대우조선의 위기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제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은 대우로 한정하는 것이 옳다.

내일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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