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한국인은 왜 트럼프를 싫어했나

입력 2016-11-28 17:36  

"시장의 진보는 제국주의적 개념이라는
강한 문화 상대주의가 한국 지식계에 만연

트럼프가 공격한 것은 1960년대 이후 형성된
좌경적 리버럴들의 위선적 세계관"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정치적 정답(PC: political correctness)과 완곡어법(euphemism)은 다르다. 완곡어법은 부드럽게 돌려서 말하는 것이어서 좌익적 세계관 혹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문법인 PC와는 완전히 다르다. ‘청소부’ 대신 ‘환경미화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곡어법이다. 외국인을 비(非)시민권자라고 부르라거나, 불법이민자를 서류미비자라고 부르는 것은 소위 ‘정답’이다. 그렇다. 좌익적 정답이다.

여기에는 강한 남녀평등, 강한 민족 다양성, 강한 상대주의적 사고가 전제된다. 물론 강한 과학 상대주의, 즉 구성주의 과학관도 포함된다. 천안함을 지금도 조작이라고 대놓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과학의 과학성 자체를 부정한다. 과학을 일종의 서사문학이라고 생각하기에 아무런 주장이건 펼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PC는 좌익의 ‘허용된 언어’다. 보편의 가치와 원칙, 이념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주의라는 모호성 속에 몰아넣는 지적 불성실성을 우리는 좌익적 언어라고 부른다.

인종과 종교, 문화에는 우열이 없고, 문명의 진보라는 것은 제국주의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소위 강한 문화 상대주의다. 한국의 교실에서도 그렇게들 가르친다. 환경주의 좌파는 상대주의 그룹은 아니지만 여기에 포함된다. 일체의 개발을 부정하고 인간의 활동을 최소로 줄여야 환경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환경론이다. 환경주의 좌파는 무신론 시대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종교 대체물로 기능한다.

마거릿 미드를 비롯한 인류학 진영은 2차 대전 전에 이미 문명의 진보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물론 미드의 사모아섬 연구는 거짓 증언에 기초한 허구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됐을 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절대적 풍요 속에서 상대주의가 서구 사상계를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신좌파의 등장은 그 결과였을 뿐이다.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거나 다양한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용인하거나, 문화는 제각각이라는 구호 아래 억압적 사회나 폭력을 용인하는 등도 그 결과다. 북한을 내재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얼빠진 주장도 상대주의 진영의 보호막에 기대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유없는 반발심이 아시아에서 가장 컸던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좌경화됐다는 증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도 토머스 쿤을 필두로 파이어아벤트, 콰인을 비롯한 일단의 미국 과학자들, 그리고 유럽에서는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 등의 포스트모던적 좌익 공세에 포위돼 있다. 이들은 보편적 제도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온몸을 던지고 있다. 문화인류학에서 시작한 상대주의적 전환이 사회학 역사학을 거쳐 심지어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혀온 것이 21세기 지적 풍토다.

자유시장론과 공동체주의 간 논쟁은 체제 논쟁의 핵심이다. 경쟁을 핵심 원리로 하는 세계화된 자유시장이야말로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유일한 체제라는 하이에크나 프리드먼, 털록 등의 보편론적 주장은 센델이나 매킨타이어 등 공동체주의자들로부터 양극화의 주범이라든가 빈익빈 부익부를 낳는다는, 끊임없는 바보들의 공세를 견뎌내야만 한다. 공동체주의적 주장은 천동설이 그런 것처럼 간단하고 쉽기에 대중에게는 잘 먹혀든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알랭 드 보통 등도 그런 전도사다. 이슬람을 의식해 메리크리스마스를 쓸 수 없다든가, 다양성을 위해 대입 정원을 소수민족에게 특별 배정하는 등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것이 트럼프였다.

그것 때문에 그는 언론을 비롯한 리버럴(좌익) 교양계급의 집단 반발을 불렀다. 트럼프를 강한 자유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 자유주의의 강령은 감세와 작은 정부만이 아니어서 보편적 자유민주주의를 그 본질로 한다. 트럼프는 자유주의의 많은 기준을 대부분 충족하지만 우익 포퓰리즘적 경향도 강하게 드러낸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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