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48) 피천득의 '인연'

입력 2017-01-13 16:31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모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산문체로 쓰는 소설과 수필

2017년이 밝았다. 올 한 해 어떤 인연들이 삶의 모퉁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피천득 선생은 수필가이자 시인이며 영문학자이다. 교과서에 실린 ‘인연’ ‘수필’ ‘플루트 플레이어’ 같은 글들로 많은 이에게 익숙한 문학가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각박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신문 기사나 방송 뉴스에서 걸핏하면 ‘소설 쓰지 말라’는 말이 들려온다. 이 말은 어느덧 ‘거짓말을 하지 말라’라는 의미가 되었다. 사실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하라’라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허구적인 이야기를 꾸미는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다.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시, 소설, 수필, 희곡 등 여러 문학 양식 가운데서 선택하여 글을 쓴다. 창조적인 이야기를 개성적인 인물과 완벽한 구성에 담아내는 ‘소설’을 ‘거짓말’과 동일시하는 행태를 바라보는 작가들의 기분은 과히 좋지 않다. 허구가 아닌 사실에 바탕에 두고 그리는 소설도 얼마든지 있다. 사실이든 허구든 ‘소설 쓰지 말라’며 인격체를 모독하고 닦달하는 행태를 지켜보는 건 피곤하고 딱한 일이다.

소설이 상상력에 바탕을 둔다면 수필은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 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담은 산문 형식의 글이다. 소설과 수필은 같은 산문이지만 소설이 허구의 이야기라면 수필은 사실을 담는 것이다. 뉴욕에 가본 적 없는 소설 주인공 ‘나’가 타임스퀘어 광장을 거닐고 브로드웨이 연극을 본 것처럼 표현하는 건 괜찮지만 수필에서는 간 적도 없는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새해 카운트다운을 했다고 쓰면 그야말로 ‘거짓말’이 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

‘소설 쓰지 말라’는 말이 자주 들려 새해 첫 연재에 수필을 꺼내 들었다. 요즘 ‘소설’과 ‘거짓말’을 치환해서 쓸 정도라면 ‘피천득’과 ‘수필’과 ‘인연’은 그야말로 동의어가 되었다. 한 작가가 이토록 선명하게 독자들의 뇌리에 자신을 심은 예는 많지 않다. 교과서에서 피천득 선생의 작품 한두 편을 읽는 것에 그치기엔 그의 수필이 선사하는 아름다움과 깊이가 몹시 치명적이다. 그래서 올 한해 좋은 만남을 기대하며 피천득 선생의 <인연>을 일독하길 권한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에 태어나 2007년 세상을 떠난 피천득 선생은 중국 상하이 호강대학을 다녔으며 1954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연구했다. 한국인이면서 일본과 중국, 미국을 두루 체험한 만큼 깊고 다양한 얘기가 수필에서 펼쳐진다.

피천득 선생이 말하는 수필이란 어떤 것일까 ‘수필’이라는 작품에서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인연>에 수록된 80여 편의 수필에 실로 다양한 얘기가 담겨있다. 나의 부모님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고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서영이에게’ ‘서영이’ ‘서영이 대학에 가다’ ‘딸에게’ 같은 글을 읽으면 된다. 피천득 선생이 외동딸 서영을 생각하는 마음이 곧 모든 부모의 심정이다.

매일 한 편 씩 꺼내 읽으라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담은 글들도 많고 춘원 이광수 선생과 얽힌 이야기도 수필에 담았다. 셰익스피어, 프루스트 같은 문학가를 비롯한 유명인에 대한 단상들도 있다.

박완서 선생은 피천득의 수필에 대해 ‘모든 군더더기를 떨어내고 남은 마지막 모습은 아름답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배울 수 있는 책’이라고 평했다. <인연>에는 앞 세대의 삶의 엿볼 수 있는 풍경이 많이 담겨 있다. 삶을 바라보는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다워 읽을수록 가슴이 훈훈해진다. 스토리가 담긴 수필도 많아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다. 평범한 일상을 잘 다듬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탁월한 글솜씨’를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을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하루에 한 편씩 펼쳐보면 좋은 인연과 멋진 삶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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