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우리에게 잊혀진 왕국 같은 느낌이다. 일찍이 철기문화를 이뤘으나 나라가 멸망해 신라에 흡수됐다. 나라는 망했어도 가야왕국 현악기인 가야금은 그 이름 그대로 1500년 가까이 우리 민족 곁을 떠나지 않았다.이 세상에 지터류(상자 모양 공명통 위에 현이 얹혀 있는 악기류) 악기가 가야금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주 형태와 수용 방법은 중국과 다르고 일본과도 다르다.
가야금은 명주실과 오동나무 통의 울림을 맨 살갗과 손톱을 이용해 소리 낸다. 음량이 별로 크지 못하면서 명주실 장력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전문연주자들은 밤톨 같은 여문 소리를 얻기 위해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가며 강인한 명주실과 십수 년 싸운다.
옛 어른들은 여름 장마에는 가야금을 치지 않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야 소리가 제대로 울린다고 했다. 명주실의 변덕 때문이다. 비단옷을 입어본 사람을 잘 알 것이다. 비단은 옷 태가 좋아도 빨래에 세심함이 필요하다.
비단옷과 가야금 줄은 성분이 같다. 습기에 약해 줄 장력이 늘어나면 음정이 제멋대로 춤춘다. 이때 연주자는 가야금을 살살 달래서 음정을 조절해야 한다. 명주실 장력이 어떤 상태이든 이에 적응하는 훈련은 가야금 연주자에겐 필수 코스다. 가야금은 큰 소리로 여러 악기를 호령하지도 못한다. 피리가 큰 소리로 불어 젖히면 가야금은 그 순간을 피해야 한다.
그럼 몸통은 항상 잘 울리는가? 오동나무를 어떻게 말렸는지, 나무 윗동인지 뿌리 쪽인지, 몇 년을 말렸는지에 따라 울림이나 성질이 모두 다르다. 통의 두께, 줄의 굵기, 연주자의 손가락 힘, 솜씨, 공력 등이 어우러져야 멋진 소리가 난다. 또 가야금은 몸통 위에 안족(줄을 받치는 기러기 발 모양의 기둥)이 얹혀 있기 때문에 몸통의 훼손이 심해진다. 전문연주자는 연주용 악기를 별도로 관리해야 한다.
한번은 중요한 녹음이 있어 아침부터 악기를 달래고 있었는데, 처음 몇 시간은 영 반응이 없었다. 악기 수명이 다했나, 내 감정이 무너졌나 하고 인내심으로 버틸 수밖에. 오후가 지나서야 비로소 교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악기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악기도 잠을 잔다. 깨달음이 참 더뎠다.
가야금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하는 음색과 섬섬옥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옛 가야금 명인은 남성이 더 많았다. 연주를 잘하는 손은 노동자의 손에 가깝다.
가야금이란 악기의 예민함, 섬세함, 까탈스러움은 만만치 않았던 가야왕국 문명의 결과는 아닐까. 이토록 영민한 가야금 소리가 오랜 세월 이 땅에 울려 퍼지고 있음에 감사하다.
김해숙 < 국립국악원장 hskim12@korea.kr >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