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앙투아네트와 '빵 루머'

입력 2017-10-15 17:38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빵이 없으면 케이크(브리오슈·과자빵)를 먹으면 되잖아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악성 루머 중 하나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망언(?)에 분노한 군중은 주먹을 쥐고 “사형!”을 외쳤다. 유언비어는 날로 불어났고 앙투아네트는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빵이 없으면~”은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나오는 예화의 일부다. 루소가 책을 집필한 1766년에는 앙투아네트의 나이가 11세에 불과했다. 인용된 예화는 1740년대 얘기였으니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시민들이 굶주리지 않게 감자빵을 장려하고 제빵학교까지 후원한 그녀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흥분한 군중에겐 사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다. 분노의 대상이 필요할 뿐이었다. 혁명재판에 회부된 그녀는 온갖 혐의를 뒤집어썼다. 국가재정 낭비와 부정부패, 친정인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남편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죄, 백성에 대한 기만 등 죄목이 끝도 없었다. 그러나 40여 명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모든 혐의가 무죄로 밝혀졌다.

재정 악화는 잇단 전쟁과 기근, 미국 독립전쟁 지원 때문이었다. 그녀가 쓴 돈은 국가 예산의 3%인 왕실 비용 중 자신에게 할당된 액수의 10%도 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황실과 오빠에게는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루이 16세가 구금 중 탈출을 기도한 사건에서도 그녀는 무죄를 받았다. 처벌할 근거가 하나도 없었지만 민중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혁명정부 측은 마지막으로 아들과의 근친상간이라는 혐의를 씌웠다. 왕에게 성적으로 만족하지 못해 아들과 관계했다는 것이다. 근친상간의 형량은 사형이었다. 당시 아들의 나이는 8세였다. 아들은 반대파가 주입한 마약 때문에 정신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아들의 ‘몽환 진술’이 사형선고의 근거였다.

이 판결은 훗날 무효화됐지만, 그녀는 1793년 10월16일 ‘인민의 면도날’ 기요틴으로 처형됐다. 38세 생일을 2주 앞둔 날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았을 때 한 사과였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수백 년간 적대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결혼동맹으로 14세에 시집 왔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은 비운의 왕비. 결혼식에 참석하러 국경을 넘을 때 꽃을 뿌려주던 시민들이 성난 군중으로 돌변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처형 전날 그녀는 “어린 아들을 비난하지 말라”며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 우리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편지에 썼다.

그녀가 처형된 광장은 이후에도 거듭된 보복과 응징의 피로 물들었다. 200여 년 전의 핏발 선 증오와 삿대질, 악성 루머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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