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아이] '1987' 박종철 사망 진상 밝혀낸 이들의 '직업적 양심'

입력 2018-01-08 11:39   수정 2018-01-08 18:30

양쪽 색깔이 다른 눈동자란 뜻의 ‘오드 아이(odd-eye)’는 한경닷컴 기자들이 새롭게 선보이는 코너입니다. 각을 세워 쓰는 출입처 기사 대신 어깨에 힘을 빼고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풀어냈습니다. 평소와 조금 다른 시선으로 독자들과 소소한 얘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편집자 주>

‘1987’의 서막을 열었던 건 그 유명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사건이었다. 경찰은 대학생의 죽음을 덮으려 했다. 실패하자 이번엔 쇼크사로 조작하려 했다. 서슬 퍼런 신군부 독재 정권 때 ‘남영동’에서 일어난 일. 그게 충분히 가능했던 시절이라고 당시를 겪은 이들은 술회한다.

그러나 사건은 끝내 세상에 알려졌다. 정권의 강압에도 양심을 걸고 발언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 보도한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현 성균관대 교수)가 30년이 지난 작년 1월 펴낸 저서 〈특종 1987 박종철과 한국 민주화〉에는 그 ‘신스틸러급 조연’들(이하 당시 직책)의 면면이 등장한다.

19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에서 물고문 당하던 박종철이 질식사로 사망한다. 이튿날 오전 ‘마와리’(まわり: 기자가 출입처를 돌아다니며 기삿거리를 찾는다는 뜻의 언론계 은어) 돌던 신 기자에게 대검찰청 이홍규 공안 4과장이 던진 “경찰, 큰일 났어” 한 마디가 도화선이 됐다.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죽는 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 사건을 숨겨야 할 대검 공안과장이 ‘딥 스로트’(Deep Throat: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익명의 제보자)가 된 셈이다. 25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 사실을 밝힌 그의 제보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묵직했다. “진실은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영동에서 조사, 서울대생, 사망.’ 얼개를 파악한 신 기자는 추가 취재를 통해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이라는 인적 사항을 알아냈다. 보고 받은 데스크가 서울대 출입 김두우 기자(전 청와대 홍보수석)에게 지시, 학적부를 뒤져 박종철이란 이름을 완성했다. 부산 주재 기자는 박종철의 고향집을 찾아 부모가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상경한 사실을 확인했다.

돌아가는 윤전기를 멈춰 석간 2판부터 실린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기사. 그렇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보도 직후 정부는 “기사를 빼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변사”라며 오보라고 강변했으나 신문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은 끝까지 버텼다고.

검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화 ‘1987’에서 하정우의 실제 모델인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이 대표적이다. 박종철이 숨진 날 저녁, 경찰 간부들이 사체 화장 허가를 받으려 하자 제동을 건다. “아들이 조사를 받다가 죽었다는데 당장 화장해서 유골 넘겨달라고 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면서. 그의 뚝심이 아니었다면 박종철 사건은 숱한 의문사 사건 중 하나로 묻혔을 터이다.

사건 사흘 만에 물고문 혐의를 최초로 밝힌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사건 은폐·축소를 시도하던 경찰에 치명타를 안겼다. 이에 경찰 측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그에게 전화해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했다고 전해진다.

의사들 역시 진실에 눈감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박종철의 사망을 최초 확인한 검안의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 씨는 당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다”며 물고문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언론과 인터뷰한 그날 끌려가 24시간 동안 경찰 조사를, 기사가 나간 날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한 주간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오 씨는 20년이 지난 뒤 “그때 비겁하게 얼버무렸다면 평생 괴로웠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부검의였던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1과장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가능성 소견을 밝혔으나 쇼크사로 각본을 짜놓은 경찰이 갖은 회유와 압력을 가했다. 부검 내용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그 과정을 상세히 적은 일기는 사건 1년 뒤 동아일보에 공개됐다. 파장은 컸다. 강민창 당시 본부장이 구속되고 황 과장 자신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토록 엄혹한 시대에도 기자와 검사, 의사 등의 직업적 양심을 건 용기 있는 결단들이 박종철 사건을 1987년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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