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질문'을 잃어버린 나라

입력 2018-02-07 18:29  

'깍두기 2㎝, 미역은 4㎝로 썰어야'가 정답?
'생각' 아닌 '믿음'을 주입하는 교육 현실
4차 산업혁명시대 눈 감은 게 위기의 본질

이학영 논설실장



“깍두기는 2㎝로 썰어야만 정답입니까?” 대한상공회의소는 작년 봄 정치권에 이런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각 정당에 돌린 ‘대선후보께 드리는 경제계 제언문’은 어느 중학교에서의 실제 상황을 담았다. 2016년 기술·가정 중간고사에서 ‘다음 조리법 가운데 잘못된 것을 고르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미역국을 끓일 때 미역은 찬물에 불려 4㎝ 길이로 썬다’ ‘감자볶음을 할 때 감자는 0.5㎝, 당근과 양파는 0.3㎝ 두께로 채 썬다’ ‘깍두기를 담글 때 무는 3㎝ 크기로 팔모썰기를 한다’ 가운데 ‘잘못된 것’은 ‘깍두기 무 3㎝’였다. 교과서에 2㎝로 돼 있기 때문이었다.

궁금증이 쏟아진다. 깍두기는 그렇다고 치고, 미역을 좀 더 길거나 짧게 썰면 왜 안 되는가. 감자와 당근과 양파의 두께와 배합에 변화를 주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걸까. 지금의 교육·입시제도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간 ‘멍청이’로 몰리기 딱 좋다. 주어진 답을 달달 외워서 최대한 많이 맞혀야 높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교육받은 인재들이 융·복합을 핵심어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어떻게 이끌어갈 수 있을까.

특정 중학교 기술·가정과목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상황이 심각하다. 대학, 그것도 국내 최고학부라는 서울대에서도 다를 게 없다. 이혜정 전 서울대 교육학과 연구교수가 쓴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에는 “고(高)학점 비결은 교수의 강의 내용을 완벽하게(농담까지) 다 받아 적는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교육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는 것인데, 우리 교육은 학생의 생각을 죽인다. 우리는 ‘1592년 임진왜란’을 달달 외는 게 지식이라고 여긴다. 선진국이라면 ‘임진왜란 같은 전쟁은 어떤 사회 변화를 갖고 왔느냐’를 묻는다.”

이렇게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들로 채워진 나라에서 도그마를 앞세운 편 가르기가 횡행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누구든 그럴듯한 사탕발림 아이디어와 슬로건을 캐낼 수만 있다면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복잡하게 따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해 마음을 사로잡으면 된다. 한 꺼풀만 파고들어가 따져 봐도 문제가 드러날 것들이 그냥 덮여진다. 요즘 우리 사회를 갈라 세우고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많은 정책과 사법이슈들이 대부분 그렇다.

한국 사회를 표류시키고 있는 포퓰리즘의 토양이 이렇게 괴물처럼 자라났지만, 그것보다 더 긴박한 문제가 이 나라의 숨통을 죄어오고 있다. 그나마 이 나라를 떠받쳐온 기업들의 발등에 불덩이가 떨어진 것이다. 무한한 창의와 유연한 사고로 새로운 사업모델을 찾아내는 기업만이 생존을 기약할 수 있는 4차 산업혁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이 나라는 여전히 ‘깍두기 무의 두께는 2㎝여야 하는’ 학생들을 쏟아내고 있어서다.

할리우드의 전통 기업들을 초토화시키며 단숨에 세계 동영상 스트리밍·콘텐츠 시장 지배자로 떠오른 넷플릭스의 최대 무기는 ‘창의적 인재’다. 이런 인재들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넷플릭스에 기존 방식에 젖은 기업들은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이 회사는 근무방식과 관련한 일체의 가이드라인을 없앴다. 출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고 휴가도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다녀올 수 있다. 출장을 비롯한 업무 비용도 제약 없이 쓸 수 있고, 연말 인사고과(평가)도 하지 않는다. 대신 ‘회사에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어른답게(adult-like)’ 행동방향을 스스로에게 질문해서 결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게 한다. 자유롭게 생각해서 최적의 경로를 찾아나가는 훈련이 된 인재에게는 최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지만, ‘한국형 인재’에게는 그 반대일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바뀌고 있다. 유럽의 중세 암흑기를 지배했던 ‘믿음의 시대’를 깨뜨리고 인류 사회에 문명과 과학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르네상스기는 ‘생각의 시대’였다. 대량생산-대량소비가 저물고 개인 맞춤형 소비와 생산의 시대가 오면서 세상은 다시 ‘생각’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의 답만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을 문제해결 과정을 중시하는 창의성·유연성 교육으로 바꿔야 합니다.” 대한상의는 ‘대한민국의 새 희망공식을 바라는 열망’을 정치권에 이렇게 호소했었다. 요즘 나라가 돌아가는 모습은 그 반대다. 진짜 위기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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