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빨갛게 타오르는 남녘의 섬, 봄단풍이 들었나…

입력 2018-04-15 15:03   수정 2018-04-15 15:04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16> 봄섬 춘백의 향연 속으로, 홍도·보길도·우도

고고하던 冬柏, 화려한 春柏으로 다시 피었네

이름만큼 붉은 홍도, 깃대봉 초입에서 정상까지 동백나무 터널
섬 전체가 동백의 화원인 보길도… 그중 으뜸은 세연정·부용리
통영 우도 동백숲, 수백년 고목들이 잘 가꾼 분재처럼 아름다워




배는 떠나고/흰동백 피었다 지네//배는 떠나고/사랑은 가고 오지 않네//바람아 불어라/폭풍우 몰아쳐라//배는 떠나고/한번 간 내 사랑 돌아오지 않네//배는 떠나고/흰동백 피었다 지네 강제윤 ‘비가’

동백은 그 이름 때문에 겨울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겨울 동백을 보기는 쉽지 않다. 동백도 추위를 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백의 절정기는 봄이다. 이즈음 남녘의 섬들은 붉게 타오르는 동백의 열기로 뜨겁다. 동백은 늦가을부터 봄까지 피는 개화 기간이 무척 긴 꽃이다. 남쪽 섬의 성질 급한 동백들은 10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이듬해 5월 초까지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그래서 동백을 부르는 이름도 계절마다 다르다. 가을에 피면 추백(秋柏), 겨울에는 동백(冬柏), 봄꽃은 춘백(春柏)이다. 동백은 통으로 뚝 떨어지는 그 결기로 인해 고결하고 절조 높은 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화려함도 장미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춘백일 때 그 화려함과 교태는 최고다. 겨울에는 수정을 도와줄 벌, 나비 같은 곤충이 없으니 동백도 굳이 꿀을 만들거나 치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봄이면 번식을 해야 하니 이때는 온 에너지를 쏟아 꿀을 만들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세상의 모든 벌, 나비와 동박새들을 유혹한다.


동백꽃물로 목욕하던 섬 여인들

오늘날뿐만 아니라 동백은 옛 선인에게도 사랑받던 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이규보나 조선시대의 서거정, 기대승 같은 당대 최고 문사들이 동백 예찬 시를 남겼다. 퇴계의 수제자였던 학봉 김성일도 매화와 함께 동백을 고고함의 상징으로 꼽으며 지극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꽃에 미쳐 살았던 조선의 선비 유박도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치자와 동백은 청수(淸秀)한 꽃을 지니고 또 빛나고 윤택한 사시(四時)의 잎을 겸하였으니 화림(花林) 중에 뛰어나고 복을 갖춘 것이라”고 평하며 동백의 도골선풍을 찬탄했다.

동백 열매는 실용성도 뛰어났다. 요즘 동백기름을 함유한 화장품이 인기지만 옛날부터 우리 여인들은 동백씨앗을 짜 머릿기름으로 사용했고 식용이나 등잔불 밝히는 데도 썼다. 남해안의 섬들에서는 섣달그믐 저녁이면 동백꽃 우린 물로 목욕하는 풍습도 있었다. 동백꽃 물로 목욕하면 종기도 치료되고 피부병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백은 주술적인 힘도 지녔다. 동백나무 가지로 여자의 볼기나 엉덩이를 치면 그 여자는 사내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을 묘장(卯杖) 또는 묘추(卯錐)라 했다.

동양뿐만 아니다. 서양에서도 동백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춘희>에 나오는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한 달 내내 밤이면 동백꽃을 가슴에 달고 다녔다. 그래서 그녀는 카멜리아의 여인(동백꽃 여인)으로 불렸다. 이제 또 절정으로 치닫는 동백, 아니 춘백의 계절이다. 겨울꽃이라는 편견 속에 잊고 지냈던 동백을 보러 떠나 보자. 그 어느 봄꽃보다 화려한 동백을 볼 수 있는 동백섬으로.


이름보다 붉은 동백섬 홍도

세계 명작 같은 섬들이 있다. 읽어보지 않았는데도 줄거리를 꿰고 있어서 마치 읽어본 듯한 착각이 드는 세계 명작. 가보지 않았는데도 방송 언론에서 하도 많이 보고 들어서 마치 가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섬. 홍도는 그런 세계 명작 같은 섬이다. 하지만 홍도는 진짜 읽어봐야 할 세계 명작 같은 섬이기도 하다. 거듭해서 읽을수록 맛이 새로워지는 걸작. 처음 가 보면 북적거리는 인파 때문에 실망할 수도 있지만 줄서서 먹는 식당이라도 진짜 맛있는 집은 맛있다. 홍도가 그렇다. 갈 때마다 새롭고 깊어지는 특별한 섬. 홍도는 빼어난 절경의 기암괴석으로 유명하지만 홍도가 동백섬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홍도의 동백은 삼사월이 절정이다. 이즈음 섬은 온통 불타오르는 동백으로 인해 그 이름보다 붉다.


홍도는 자체로 하나의 산인데 섬 중앙의 깃대봉 양쪽 기슭에 홍도 1구와 2구 두 개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270여 종의 상록수와 170여 종의 동물이 살아가는 홍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이다. 동백나무들은 깃대봉 초입부터 도열해 정상까지 가는 내내 터널을 이루고 서 있다. 왕복 2~3시간이면 족한 동백 숲길. 홍도 1구 선착장 초입에 있는 당숲도 빼놓을 수 없는 동백숲이다. 오랜 세월 섬사람들이 의지하고 받들었던 신들의 정원. 섬사람들, 특히 홍도 같은 먼 바다 섬사람들에게 바닷길은 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생사의 바다였다. 그러니 신에 대한 외경은 깊고도 깊었다. 이 당숲은 그래서 숯을 구워 팔던 섬사람들에게도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아름드리 동백나무 고목들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홍도는 동백꽃도 꽃이지만 해상의 기암괴석이야말로 섬의 정수다. 한국의 계림이고 한국의 하롱베이다. 유람선을 타야만 이 홍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해상에는 남문바위, 시루떡바위, 독립문바위, 병풍바위, 만물상, 슬픈여, 일곱남매바위 등 기암괴석 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바위섬마다 깃들어 있는 이야기는 전설 그대로 고향이다. 유람선마다 해설사가 승선해 바위섬에 깃든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구수한 입담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최고의 동백나무 가로수길, 보길도 부용리

보길도는 조선시대 대표적 시조인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 창작된 공간이다. 고산이 보길도에 만든 부용동 원림은 비원, 소쇄원과 함께 한국 3대 원림(전통정원)으로 꼽힌다. 그래서 사람들의 보길도에 대한 기억은 어부사시사와 부용동 원림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보길도는 섬 전체가 동백의 화원이다. 발길 미치는 곳마다 동백 없는 곳이 없다. 허름한 오두막집 정원 한켠에도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보길도는 이 즈음 불 밝힌 단심의 그 붉은 동백으로 인해 온 섬이 환하다. 봄 동백은 꿀이 많기도 하다. 허기질 때면 동백꽃 몇 개 따서 꽃받침에 가득 고인 꿀을 후루룩 마시면 허기가 가실 정도다. 그래서 동백꽃에는 벌, 나비 같은 곤충뿐만 아니라 동박새나 직박구리 같은 새들도 날아들어 열심히 꿀을 따먹는다. 그때마다 나그네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그토록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어째서 벌, 나비나 동박새로 태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보길도에서도 동백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세연정과 부용리다. 고산의 정원인 부용동 원림은 3대 공간으로 분류되는데 유희공간인 세연정, 주거공간인 낙서재, 선계 공간인 동천석실 지역이 그곳들이다. 이 세 공간이 모두 동백의 정원이기도 하다. 세연정 정원에는 세연정이란 정자와 연못들이 있는데 그 주변으로 수백 년 아름드리 동백나무 고목들이 늘어서 있다. 이 정원에서 동백은 두 번 꽃을 피운다. 한 번은 나무에서 또 한 번은 연못의 수면 위에서. 동백은 그 꽃이 질 때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온몸으로 낙화한다. 연못 위에 떨어진 동백은 붉은 빛이 더욱 선연하다. 이 연못 수면 위의 동백 앞에 서면 도무지 그 처연한 아름다움 앞에서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그대로 주저앉아 저물도록 동백만 보고 있어도 좋다. 수면 위 동백을 따라 한세월이 가고 또 한세월이 온다.


어렵게 발길을 돌려 부용리 마을 초입에 이르면 이제는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길가를 따라 가로수를 이루고 있다. 이미 수백 년 전에 형성된 동백나무 가로수길. 아마도 이 길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백나무 가로수 길이 분명하다. 이 동백 가로수 길은 부용리 마을 회관 앞 동백나무 군락지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선계의 공간인 동천석실 오르는 숲길 또한 동백 천지다. 고산이 차를 끓여 마시던 산중정원인 동천석실에 오르면 섬이지만 바다가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 같은 신선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마음이 그토록 편안할 수가 없다. 이 동백들로도 꽃에 대한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갯돌 해변인 예송리의 상록수림과 공룡알처럼 크고 둥근 돌돌이 해변에 가득한 보옥리 동백을 보러 가시라. 화룡점정. 거기에 소복을 입은 여인처럼 처연한 흰 동백이 피는 곳, 정자리 고택을 찾아가면 보길도 동백 기행은 완성된다. 그대 후회 없이 동백에 물들게 되리라.

작지만 빼어난 동백섬 통영 우도

봄 동백이 아름답기는 통영 섬들도 빠지지 않는다. 욕지도, 한산도, 사량도 등 통영에도 이름난 섬이 많지만 동백이 아름답기는 단연 우도가 손꼽힌다. 연화도와 지척인 우도는 면적 0.447㎢에 20여 가구가 살아가는 아주 작은 섬이다. 그러나 동백꽃으로는 다른 큰 섬들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우도란 이름의 섬은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다들 소처럼 생겼다 해서 우도다. 통영의 우도 역시 수많은 우도 중 하나다. 통영 미륵산에서 바라보면 소가 누워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해서 우도 혹은 소섬이라 했다고 전한다.

우도의 동백숲은 큰 마을 언덕부터 시작되는데 수백 년 동백나무 고목들은 마치 잘 가꾼 분재처럼 아름답다. 언덕 넘어 뒷등 몽돌해변으로 가는 내리막길에는 동백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데 여름에는 더없이 시원한 이 길이 봄에는 붉은 열기로 뜨겁다.

이 길을 빠져나가면 해변에 주인이 떠난 지 오래인 빈집 한 채가 덩그러니 앉아 있다. 마음이 짠해진다. 이 해변 건너에는 아주 특별한 무인도가 하나 있다. 가슴이 뻥 뚫려 있는 이 섬을 사람들은 구멍 섬 혹은 혈도(穴島)라 부른다. 오랜 세월 파도의 공격으로 섬은 구멍이 뚫려버렸을 것이다. 구멍 섬은 어쩌면 당신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 줄지도 모른다.

가슴이 시원해졌다면 이제 적막보다 고요한 숲길을 걸어보자. 옛날 섬사람들이 나무하러 다니던 길을 다시 복원한 섬 둘레길. 4.2㎞에 이르는 숲길은 더없이 고즈넉하고 평탄하다.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는 눈부시고 통통거리는 어선들의 기관 소리는 정겹다. 이 길에서 숲은 끝 간 데 없이 깊어질 듯 하지만 길은 결국 선착장 마을 초입에서 끝나고 만다. 아쉬움에 가슴 저릴 때 거기 또 기적처럼 동백나무 터널이 펼쳐진다. 만개한 동백꽃들의 향연으로 도무지 숲을 빠져나갈 엄두가 나지 않게 만드는 마법의 터널이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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