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먼나라 이웃나라

입력 2018-05-14 17:48   수정 2018-05-16 12:33

오형규 논설위원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눈을 뜬 것은 88 서울올림픽과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다. 백인은 무조건 미국사람이 아니며, 세상 사는 모습은 피부색만큼이나 다양하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세계 속의 한국’으로 자리매김한 바탕이다.

그즈음 한국인의 시야를 넓혀준 ‘만화’가 있었다. 이원복 교수(현 덕성여대 총장)의 《먼나라 이웃나라》였다. 1987년 고려원미디어(당시 고려가)에서 펴낸 이 시리즈는 만화가 폄하되던 시절에도 부모가 자녀들에게 권장할 정도였다.

출판만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에서 《먼나라 이웃나라》는 1000만 권 넘게 팔린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다. 웬만한 역사서보다 낫다는 평가를 듣는다. 만화라기보다는 72세 노교수의 평생이 담긴 역사·문화서에 가깝다. 그런 《먼나라 이웃나라》가 최근 20권을 채웠다.

이런 역작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 만무하다. 이 교수는 경기고,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나온 수재지만 가난한 집 막내였다. 그림에 소질이 있던 그는 고교 때부터 생활비를 벌려고 만화를 그렸다. 일본만화를 베끼는 작업도 했다고 한다.

1975년 독일 뮌스터대에서 디자인과 서양미술사를 공부할 때도 학비 조달을 위해 만화를 그린 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 여행 때 ‘아스테릭스’ 시리즈를 보고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긴 호흡의 시리즈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 시절 작품이 1975년부터 6년간 월간 새소년에 실린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었다. 이를 모태로 1981~1986년 소년한국일보에 ‘먼나라 이웃나라’를 연재했다. 유럽생활 10년 발품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대히트를 쳤다.

중간에 우여곡절도 있었다. 외환위기 때 출판사 부도로 판권이 김영사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필력은 오히려 더 왕성해져 2000년대 들어 일본, 우리나라, 미국, 중국, 에스파냐를 연이어 펴냈다. ‘가로세로 세계사’라는 타이틀로 출간한 발칸반도, 동남아, 중동, 영연방편을 시리즈에 편입시키고 이번에 20번째 ‘오스만제국과 터키’까지 내놨다.

역사적으로 책 한 권이 세상을 바꾸듯, 《먼나라 이웃나라》는 만화로 현대의 한국인을 우물 안에서 건져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은 연간 해외여행객이 2000만 명이 넘고 국내 외국인 거주자가 200만 명에 이르는 글로벌 시대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마치 동북아의 외딴 섬나라처럼 세계 동향과 세계인의 관심사에 여전히 둔감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실제로는 ‘아는 만큼만 본다’고 해야 할까.

다행히 《먼나라 이웃나라》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교수는 후속작으로 러시아·동구편을 기획 중이다. 만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계속 보여주기 바란다.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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