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앞으로 못 나아가게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

입력 2018-05-16 17:31  

'기존업자 보호' 위해 직조기 폐기한 프랑스
산업혁명에서 영국에 뒤처진 건 자업자득
문재인 정부의 '규제혁파 통한 혁신성장' 교훈 삼길

이학영 논설실장



프랑스가 ‘산업혁명의 원조(元祖)’임을 자처하는 데는 나름의 사실(史實)이 없지 않다. 산업혁명에 불을 댕긴 자동직조기를 영국보다 앞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수력방적기를 내놓은 것은 1771년, 프랑스의 자크 드 보캉송이 자동직조기를 발명한 해는 1745년임을 내세운다. 보캉송의 프랑스는 영국보다 26년 앞서 직조기를 내놓았을 뿐 아니라, 비단공장의 생산 공정을 자동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렇지만 산업혁명의 ‘프랑스 기원론(起源論)’을 인정하는 전문가는 없다. 비단공장에 설치됐던 보캉송의 직조기가 금세 치워졌고, 국내외에 전파되기는커녕 아예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의 직조기로 인해 일자리를 잃을 것을 걱정한 비단 길드(수공업자 조합)가 들고일어난 탓이었다. 수공업자들은 직조기를 불태우고는 보캉송에게 “기계를 계속 발명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보캉송은 숨을 거둘 때까지 살해 협박에 시달린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혁신성장’을 슬로건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실패의 역사’다. 과감한 규제혁파를 통해 ‘혁신생태계’를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는, 공개된 발언으로만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규제혁신은 혁신성장을 위한 토대다. 지금까지 시도된 적 없는 과감한 방식, 그야말로 혁명적 접근이 필요하다.”(1월22일 규제혁신 대토론회) “우리나라는 네이버나 카카오 이후에는 큰 성공 사례가 별로 없다. 청년들이 모범적이고 모험적인 혁신 창업에 청춘을 바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뒷받침하겠다.”(2월12일 학생 창업인과의 간담회) “경제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혁신성장이라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 마음껏 연구하고 사업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조성하고, 신기술·신제품을 가로막는 규제를 풀겠다.”(4월20일 LG사이언스파크 개장식)

유감스럽게도 대통령의 그런 의지(意志)가 구체적인 행동과 성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 드론 빅데이터 등 15대 분야 혁신성장 주요 대책을 내놓은 게 작년 9월이지만, 그뿐이었다.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되면 일정 기간 동안 기존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해 주겠다는 ‘규제 샌드박스’는 9개월째 “시행하겠다”는 말만 되풀이될 뿐, 감감무소식이다. 그런 규제 샌드박스를 여당은 6월 지방선거 공약으로 또 꺼내 들었다. 건망증 아니냐며 웃어넘겨야 할지, 답답해진다.

그러는 사이에 핀테크, 바이오 등 분야의 신기술업체들이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 규제가 없는 외국으로 사업 거점을 옮기는 ‘기업 망명’이 잇따르고 있다. “전 세계 100대 스타트업이 한국에 들어오면 13곳은 사업을 시작할 수조차 없고, 44곳은 사업 조건을 바꿔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 게 작년 7월인데, ‘혁신성장’을 강조하는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찾아볼 수 없다. 어제 통계청이 “취업자 증가폭이 3개월째 10만 명대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이라는 내용의 4월 고용동향 통계를 발표했지만, 당장의 일자리 재난보다 ‘앞으로’가 더 걱정스럽다는 사람들이 많다.

문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맞은 지난 10일 SNS에 띄운 소감문에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 1년이었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변화를 두려워하고, 거부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여전히 강고하다”며 ‘개혁에 대한 저항’을 경계했다.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진행하고 있는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염두에 둔 말이었겠지만, ‘혁신성장 생태계 조성’을 놓고 지난 1년간 빚어진 상황에 더 들어맞는 말이 아닐까 싶다.

역사가들은 영국이 기술적으로 앞서 있던 중국 프랑스 등을 제치고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시작했고, 성공시킨 비결로 ‘진취적 정신의 결실을 만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 훌륭한 정부와 제도’를 꼽는다. “임기를 마칠 때쯤이면 ‘음, 많이 달라졌어. 사는 것이 나아졌어’라는 말을 꼭 듣고 싶다”고 한 문 대통령의 소망이 꼭 이뤄지기를 바란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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