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자살로 꾸민 살인 밝혀낸 '조선판 국과수'

입력 2018-10-18 18:39  

100년 전 살인사건

김호 지음 / 휴머니스트 / 400쪽│2만2000원



[ 서화동 기자 ]
1905년 5월 경북 문경군 신북면의 양반 안도흠이 이웃에 사는 상놈 정이문이 자신의 며느리 황씨를 겁간하려다 발각되자 도주했다고 군수에게 신고했다. 정이문과 그의 아버지는 도주한 상태. 관아에 끌려간 정이문의 조부 정태극은 손자가 황씨와 5년 이상 불륜관계를 맺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나서 황씨가 정이문의 집 서까래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신고가 또 접수됐다. 숨진 황씨를 발견해 신고했다는 남편 안재찬은 “아내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고 진술했다.

현장에 출동한 군수가 검시에 들어갔다. 오작사령이 황씨의 옷을 모두 벗기자 신장 4척9촌의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알몸이 드러났다. 얼굴색은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희기도 했다. 구타를 당해 사망했을 때 나타나는 시반(屍斑)이었다. 목이 졸린 자국, 즉 액흔(扼痕)도 뚜렷했다. 늑골과 가슴 부위에도 구타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해자는 알 수 없는 상태. 결정적인 증거는 줄을 맨 서까래 위에서 나왔다. 자살한 것이라면 줄을 맨 들보나 서까래에 앉은 먼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야 하는데 황씨가 목을 맸다는 서까래에는 단 하나의 줄 자국만 선명했다. 아내에 대한 의심과 분노 때문에 안재찬이 그를 구타하고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한 것이다.

《100년 전 살인사건》은 조선시대 살인사건 보고서인 검안(檢案)을 통해 당대의 일상사를 들여다본다. 검안은 검시문안(檢屍文案)의 줄임말이다.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검사하고 작성한 소견서, 즉 법의학적 판결문인 시장(屍帳)과 사건 관련자 심문 기록을 포함한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검안은 2000여 책에 달한다. 사건으로 치면 대략 500건, 대부분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작성된 기록이다. 18~19세기 검안은 많지 않다. 저자는 100여 년 전 조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수사 과정을 통해 살인이라는 사회적 일탈이 비추는 당대의 사회상을 미시적으로 복원한다.

검안의 내용은 다양하다. 살인을 자살로 위장한 사건, 사람을 죽이고도 여우를 때려잡았다는 양반, 아이를 납치해 간을 빼먹은 나환자, 사위를 살해한 딸을 목 졸라 죽인 친정엄마…. 조선 최고의 법의학 교과서인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에 실린 수사기법들이 사건 해결을 위해 총동원됐다. 조선의 법의학은 중국 원나라에서 들여온 ‘무원록’을 토대로 세종 때 ‘신주무원록’이 간행되면서 사건 조사에 활용되기 시작했고, 정조 때 편찬된 ‘증수무원록언해’는 조선 말까지 법의학 지침서로 활용됐다.

살인사건은 통상 두 차례 조사를 했다. 사건 발생 지역의 지방관이 1차 조사관인 초검관을, 인근 지역의 지방관이 2차 조사관인 복검관을 맡아 조사를 지휘했다. 1, 2차 조사 내용이 부합하지 않으면 다른 지역 지방관이 3차 조사를 했다. 검시 과정은 철저히 기록으로 남겼다. 옷을 하나씩 벗기면서 기록한 시체의 상태가 너무나 상세해 당시 사람들의 의복문화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심문 과정과 내용은 관련자들의 진술을 구어체 그대로 받아 적어서 오늘날의 녹취 기록에 버금갈 정도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검안을 보면 심문은 고발한 삶, 죽은 사람의 친인척, 목격자나 범행을 도와준 주변인 순으로 진행된다. 이들 모두의 진술을 확보한 뒤 정범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심문한다. 사건의 전말을 최대한 조사한 뒤 용의자를 심문함으로써 빠져나갈 구멍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서였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보면 당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집성촌의 권씨 일가가 똘똘 뭉쳐 범인을 숨기려 했던 경남 산청의 ‘김조이 사건’은 무려 다섯 차례에 걸친 조사 끝에 목격자인 여종의 실토로 진실이 드러났다. 남편이 아내를 때려죽인 뒤 자살로 위장한 것이었다. 자살과 타살을 넘나드는 조사관들의 보고서 내용, 중요한 증인의 죽음, 다섯 차례 조사 과정에서 보여준 관련자들의 증언 번복과 위증은 진실 규명의 심각한 장애물로 작용했다. 의심이 명확히 풀리지 않은 사건의 경우 용의자에 대한 처벌을 가볍게 하거나 속전(贖錢)을 받고 풀어주는 점을 악용한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사랑하지 않은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기 위해 남편을 살해한 딸을 용서할 수 없다고 목 졸라 죽인 친정엄마, 자신이 음탕하다는 소문을 퍼뜨린 노파를 칼로 찔러 살해한 뒤 관아에 자수한 강진의 여성 김은애, ‘의로운 폭력’을 내세운 복수. 이런 사건들에 대한 조선의 처벌은 지금보다 훨씬 가벼웠다. 사람다움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서였다. 검안에 당대의 ‘망탈리테’(한 사회를 특징짓는 관습적 사고 양식의 총체)가 담겨 있다고 저자가 말하는 이유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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