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은둔의 지도자'들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

입력 2018-11-13 09:30   수정 2018-11-13 09:30



(박동휘의 한반도는 지금 / 정치부 기자) 2000년 10월23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 고위 관료로는 최초로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났다. 그녀는 그 때의 인상을 회고록에 남겼다. 2003년 발간한 '마담 세크레터리(Madam Secretary)'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김정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그가 매우 예의바르게 자랐으며, 질문을 답하기 위해 보좌관을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정일은 모든 결정을 자신이 한다는 인상을 주려 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2000년 6월15일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있던 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에게서 받은 인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는 비밀에 부친 북과의 몇달간의 협상 끝에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 순안공항에 첫 발을 디뎠다. 김정일은 공항에 영접을 나와 무개차를 타고 약 50분간 김대중 대통령과 평양시내를 관통해 환담장소로 갔다. 훗날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정일과의 환담에 대해 “김정일이 매우 똑똑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평양의 은둔자’와의 실제 만남은 2000년이 처음이었다. 안기부의 정보 보고 속에서나 만나던 김정일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과 호기심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만해도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권력을 승계한 김정일의 리더십에 대해 이런저런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아버지 세대의 가신들에 둘러싸여 있는 꼭두각시 아닌가하는 의문이었다. 이 점을 의식한 듯,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김정일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줄도 알았다”고 썼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는 외부인들이 ‘김씨 일가’를 만났을 때 받는 인상이 대부분 비슷하다고 얘기했다.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저서에서 그는 김정일과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 ‘3층 서기실’로 총집결되는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인이 보기에 ‘매우 똑똑하다’는 생각을 갖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북한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 사는 인물, 특히 권력을 손에 쥔 인간이 주는 매력은 꽤 큰 것 같다. 게다가 허락 없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에 있는 현대판 황제를 만났을 때의 충격은 대부분 오감을 흥분시키는 자극제에 버금가지 않을까. 마르코 폴로가 몽고제국의 쿠빌라이 칸을 만났을 때나 마테오 리치가 선교사로서 명(明)나라의 만력(萬曆) 신종(神宗)을 알현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전례없는 통일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경제적 통합을 최우선시하면서,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비핵화 협상의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이 마주앉게끔 하는 촉진자 전략은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했던 성취를 이뤘다. 북한에 가장 관대한 정책을 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클린턴 행정부에서도 미·북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못했고, 실무급 회담조차 공화당의 반대에 부딪혀 비밀리에 열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이 같은 결단을 내린 제1의 배경은 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갖고 있는 평화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다. 또 하나의 추동력은 문 대통령과 김정은 간의 유대다. 문 대통령은 총 세차례에 걸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와 경제발전에 대한 그의 진의를 듣고, 읽었다고 수차례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설득한 핵심 포인트도 문 대통령의 김정은에 대한 믿음이다.

이달 8일로 예정됐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간 고위급 회담이 연기된 이후로 북한 비핵화 협상이 난항에 빠져들고 있다. 회담 재개 여부도 불투명한 상태다. 북핵 협상과 관련해 이쯤에서 한 번 되돌아볼 일이 하나 있다. 객관적 데이터와 주관적 인상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에 관한 얘기다.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NPT 탈퇴 선언을 하면서 일어난 북핵 위기는 수많은 변곡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핵무기의 완성으로 귀결됐다. 협상은 늘 롤러코스터처럼 희망과 비관을 오갔으나 종착점은 북의 기만이었다.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이번에는 다르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라는 가정 또한 무시하기는 힘들다. 1993년 이후 25년에 걸쳐 북한이 세계에 가르쳐 준 교훈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중국조차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끝) /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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