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억압과 차별에 민족의식 싹 터…'단군의 자손' 인식 확산

입력 2019-03-01 18:30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42) 여러 갈래의 정신




충역의 혼잡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중국에서 그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실패감을 맛보았다. 천신만고로 준비해온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허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곧이어 임시정부 내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이 들고일어났다. “당신들이 언제 국내 인민으로부터 정권을 받았소.” 그들은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에 임시정부의 해체를 요구했다.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이승만의 심경도 김구와 비슷했다. 동년 10월 이승만은 미주의 동포에게 환국 인사를 전하면서 “너무나 통분해 차라리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고 했다. 동포끼리 싸우는 통에 임시정부가 사사단체(私私團體)로 전락해 국제사회의 승인을 못 받은 가운데 외국군대가 남북을 갈랐고, 그에 편승하는 정치세력이 가득해 충역(忠逆)이 혼잡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홉스적 자연상태

중국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면서 몇 차례나 단합을 호소했다. 1939년 국민당정부의 왕룽성은 한국인 독립운동가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들은 개성이 워낙 강한 데다 자존심이 세며 자기중심적 경향이 짙다. 서로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해 진정한 통일을 이루기는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당파 간에 극심한 시기, 질투, 견제 현상이 난무하고 있다.” 미주의 독립운동가 사회를 관찰한 미국인의 시선도 냉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후 신탁통치안의 원형이 된 미 국무부의 랭던보고서(1942)는 “한국인은 정치 경험의 부족으로 그들 나라를 어떻게 운영할지 모르고 그들 나라를 방위할 능력도 없으므로 적어도 한 세대 동안 강대국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나는 80년 전의 한국인 사회에 대한 여러 외국인의 이 같은 평가를 부정할 요량이 없다. 이전 연재의 관련 대목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천자-제후-대부-사-서의 위계로 짜인 국제질서였다. 지배와 동의의 원리가 배제된 가운데 개별인신에 신역(身役)을 차별 부과하는 체제였다. 그로 인해 잘 뭉친 사회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왕조가 해체되니 각 위계에 놓인 개인이 바닥으로 와락 쏟아졌다. ‘쟁반 위의 모래알’과 같은 사회 양태가 그렇게 조성됐다. 국가 이전 ‘홉스적 자연상태’로의 회귀였다. 일제하 35년에 걸쳐 사회의 그런 성질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조종 500년의 추억

그 ‘홉스적 자연상태’가 해방 이후 독자의 ‘국가상태’로 재건되는 과정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이다. 그를 위해선 우선 일제하에서 한국인의 정신이 보인 몇 갈래의 흐름을 파악하고 진단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조선왕조의 지배층 양반 신분의 정신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조선 세세(歲歲)의 원수 왜적이 지배하는 난세였다. 그들은 난세의 위험을 피해 은둔하면서 조종(祖宗) 500년과 소중화(小中華)의 맥을 회복할 성인의 출현을 고대했다. 그들은 근대문명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에 적대적이었다. 총독부가 토지를 수용해 신작로를 닦고 철로를 놓을 때 그들은 분개했다. “저것들이 우리의 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 해방 이후는 더욱 심한 난세였다. 오랑캐 일본은 그래도 인간이지만 새로 들어온 미국과 소련은 아예 금수였다. 그들은 500년 화맥(華脈)을 잇는 선현을 제사하기 위해 철 따라 향교, 서원, 영당(影堂)에 모이길 멈추지 않았다. 그 집단의 물리적 위세는 점점 시들었지만, 전통 사회에 발한 그들의 정신적 지도력은 건재했다.

민족의 탄생

둘째는 전통문화의 변이로서 민족의 탄생이다. 우리 한국인은 단군의 자손으로서 언어와 문화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운명공동체라는 정치의식은 이전 시대엔 없었다. 조선 문명의 시조는 기성(箕聖), 곧 기자 성인이었다. ‘민족’이란 말은 1900년대에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다. 그 이전엔 ‘민족’이나 그에 상당하는 말이 없었다.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받으면서 한국인은 민족이란 공동체를 발견했다. 최남선이 쓴 3·1독립선언서는 그 민족에 ‘자유인의 공동체’라는 선진적 뜻을 담았다. 그렇지만 보통의 사람에게 더 강렬하게 전해진 민족의 함의는 ‘우리 모두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혈연공동체 의식이었다.

그 같은 의식의 전환을 훌륭하게 묘사한 사람으로 신채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자전적 소설 《꿈하늘》에 의하면 신채호는 1907년 기존의 모든 전통과 결별하면서 민족주의자로 환생했다. 단군에 뿌리박은 박달 겨레의 일원으로, 삼한의 씩씩한 장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민족은 역대 영웅과 위인의 정신적 총합이다. 나는 민족이요, 민족은 나다. 이 강렬한 정신적 전체주의는 오로지 왜적과의 승리만을 위한 무력 전쟁을 추구한다. 그것을 거부하는 온갖 잡것으로서 “공자, 석가, 예수, 워싱턴, 관료, 지식인, 실업가, 외교론자”는 죄다 “똥물에 튀겨 지옥 불에 던질 것”이었다. 이렇게 생겨난 민족주의는 지난 100년간 한국인의 정치의식을 점점 강렬하게 지배해왔다.

공산주의의 길

셋째는 공산주의로 향한 길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했다. 다음해 1918년에는 벌써 연해주 한국인 사회에서 공산당이 조직됐다.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정 지분으로 참여했다. 이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여러 사회단체와 정치조직이 국내에서 결성됐다. 1925년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5년의 짧은 역사에서 볼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총독부의 탄압이 강력했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여러 당파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45년 해방을 맞아 조선공산당이 재건될 때 그에 참여한 한국인의 수나 충성도는 다른 어느 정당을 능가했다.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공산주의의 이해는 동아시아 유교의 그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공산주의 혁명의 열기가 동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신속히 전파된 것은 서양 제국주의가 진출한 이래 이 지역의 전통 국가체제와 정치철학이 거의 해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공산주의가 다수 한국인을 포섭한 것은 현실의 모순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제의 민족적 차별에 더해 소작농으로 또는 임노동자로 지주와 자본가의 지배를 받는 처지였다. 양반과 상민의 차별 감각도 여전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민족적, 계급적, 신분적 차별은 설명돼야 했고 해결돼야 했다. 공산주의가 큰 흡인력을 발휘한 것은 그것만이 이 모든 고난의 구원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양의 정치철학과 사회과학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지성의 공백이 공산주의의 정신적 독재를 허용했다.

태평천하

넷째는 절대다수의 보통사람에게 열린 황국신민(皇國臣民)의 길이다. 그들은 원래 조선왕조의 신민이었다. 일제의 지배로 그들의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신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농민은 “청 황제를 대신해 일 황제가 반포한 달력을 받으니 세상이 변한 줄 알겠다”고 했다. 시간의 지배자가 바뀌었다. 큰 변화였다. 그래도 보통사람에겐 그리 중요한 변화가 아니었다. 그들의 일상은 오히려 개선됐다. 양반의 토호질이 멈추고, 비적이 사라지고, 조세가 공정하고, 장시가 늘어나고, 막힌 저수지가 준설됐다.

그런 세상을 소설가 채만식은 ‘태평천하’라고 묘사했다. 문학적 발상만은 아니었다. 시대적 감각이기도 했다. 1927년 경북 예천군 어느 마을에서는 30년 만에 단오 축제가 열렸다. 한 양반은 그날의 일기에다 “성황제가 끝난 후 동리민이 동사(洞舍)에 모여 배불리 먹고 취하고 웃고 즐기니 이 또한 태평기상이 아닌가”라고 적었다.

뒤이어 전쟁의 시대가 열리자 젊은 세대가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변했다. 그들은 개인의 자립과 책임을 강조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였다. 국가가 부르면 몸을 던질 각오가 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인간이었다.

마지막 다섯째는 자유의 길이다.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길이다. 그에 대해선 다음 회에서 소개한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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