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관념 아닌 관찰 중시해야 진실 보인다"

입력 2019-03-27 17:22  

프랜시스 베이컨 《신기관》


[ 백광엽 기자 ]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사상과 지식은 2000년 동안 서구 사회의 ‘진리’였다.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진다’는 그의 단언을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직접 실험해보기 전까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처럼….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아리스토텔레스 제국’에 반기를 든 최초이자 대표 주자다. 《신기관(Novum Organ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기관(Organum)》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신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식 관념성에서 벗어나 사실에 기초한 실증학문으로 나아가야 새로운 인류 문명을 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손이 도구를 활용하듯, 진리 창조기관인 인간 정신도 ‘귀납법’이라는 도구로 무장할 것을 강력 주문했다.

17세기를 근대의 시작이라고 할 때 베이컨은 그 문을 연 사람이며 《신기관》은 근대과학 정신의 초석을 마련한 저작으로 꼽힌다. 그 문으로 갈릴레이와 데카르트가 들어왔고, 뉴턴이 입장하며 17세기 ‘천재의 세기’(영국 과학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꽃을 피웠다. 종래의 사변적 경향에 제동이 걸리고 실증적 학문의 권위가 고양돼 근대정신과 과학혁명의 여정이 시작됐다.

《신기관》은 개별적 사실이나 원리로부터 더 확장된 일반적 명제를 이끌어내는 ‘귀납법’이야말로 세상의 진실을 발견하는 요체라고 주창한다. 이런 생각은 서구철학사 2대 조류의 하나로,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경험론’을 탄생시켰다. 이 책이 ‘합리론 시조’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비견되는 이유다.

관념론에 반기든 근대정신의 정수

《신기관》 이전의 철학·학문 세계는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추론해내는 연역법이 지배했다. 베이컨은 “연역 추론은 마음속 관념들에 기초한 끼워 맞추기에 집착해 억지결론을 내리며, 오류를 강화하고 진실의 발견을 방해한다”고 봤다. 그러면서 귀납법이 유일한 희망이며 그렇게 획득한 지식·학문만이 인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다고 적었다.

특히 당시 연역 논리학 중심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삼단논법의 유용성을 부정했다. ‘인간은 이성적이다. 철수는 인간이다. 따라서 철수는 이성적이다’는 식의 삼단논법은 명제 사이의 관계만을 얘기할 뿐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지 못한다며 평가절하했다. “삼단논법은 명제로 구성되고, 명제는 단어로 구성되고, 단어는 개념의 기호로 구성된다. 건물의 기초에 해당하는 개념들이 모호하거나 불완전하게 추상된 경우 그 위의 구조물은 결코 견고할 수 없다.”

베이컨의 통렬한 비판 대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그리스적인 목적론적 세계관 전체였다. 그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사고·추리·공상하는 학문은 ‘참’을 발견할 수 없다며 여럿이 협력해 실험하고 관찰하는 과학으로 새로운 참을 완성하자고 제안했다. “낡은 연역 논리에 집착하지 말고 귀납적으로 직접 진리를 구한다면 인류가 과학의 힘으로 우주를 지배할 날도 머지않았다”며 문명을 낙관했다.

하지만 귀납법을 채택한다고 저절로 자연의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베이컨은 “인간 정신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편견, 즉 우상을 먼저 제거하자”고 주문했다. 관찰이나 실험에 바탕하지 않은 일반적인 명제를 ‘우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종족·동굴·시장·극장의 우상 등 4개의 우상을 참된 지식에 접근하는 길을 가로막는 편견으로 적시했다. 인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말고(종족),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고(동굴), 언어를 명확히 사용하고(시장), 잘못된 권위나 관습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극장)는 주문이다.

"편견·선입견 벗어나야 문명 꽃피워"

베이컨은 작은 일을 확대 해석하는 기존 귀납법이 아닌, 경험과 이성의 조합에 기반한 ‘참된 귀납법’을 강조했다. 몇몇 실험을 과장해 잘못된 결론으로 치닫는 단순 귀납론자들을 ‘개미’에 비견했다. 경험과 사례를 모으기만 할 뿐 올바른 추론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현실의 경험을 무시하고, 일반 원리로부터 쉽게 결론을 이끌어내는 연역론자들은 ‘거미’로 지칭했다. “자기 안의 지식으로 사실을 예단한다”는 지적이다. 베이컨은 해법으로 ‘꿀벌’의 방식을 제안했다. “꿀벌은 들판의 꽃에서 재료를 모은 뒤 스스로의 힘으로 변형시켜 소화한다. 진리를 찾는 과업은 이와 같다. 경험적 능력과 합리적 능력을 더 긴밀하게 결합시킨다면 인류는 충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신기관》은 ‘가설 세우기’라는 과학적 탐구방식을 경시하고 있다. 베이컨이 폄훼한 연역법도 이후 진화를 거듭해 수학 물리학 등에서 핵심적 방법론이 됐다. 그럼에도 인간 지성의 편견을 경계하고 지식 생산의 새 길을 제시한 《신기관》의 장점은 퇴색하지 않는다. 베이컨은 타계한 이듬해인 1627년 출간된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귀납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과학 단체 출범을 제안했다. 이 구상은 후일 영국 왕립학회와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라는 ‘과학혁명 요람’을 현실화했다.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에서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근대 정신의 화신’ 베이컨이 오늘의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가 묵직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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