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일군 기업, 상속세 무서워 팝니다"

입력 2019-04-14 17:56   수정 2019-04-29 20:15

중견·중소기업 '상속세 공포'

상속액의 최고 65% 세금폭탄
M&A 매물 2년새 28% 늘어



[ 김진수/김정은/나수지 기자 ] 가업 승계를 포기하고 회사를 매각하는 중견·중소기업이 늘고 있다. 최고 세율 65%(경영권 상속 때 할증세율 포함)에 달하는 상속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가업상속공제 제도는 현실과 동떨어져 가업 승계 유인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14일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중견·중소기업 인수합병(M&A)은 2016년 275건에서 지난해 352건으로 28% 늘었다. 매년 증가하는 추세로 올해 1분기에도 73개 기업의 경영권이 매각됐다.

삼정KPMG의 경영권 승계 전문팀 관계자는 “창업주가 70대 이상 고령인 중소기업은 거의 대부분 잠재 M&A 매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엔 사모펀드들이 가업 승계를 포기한 기업을 찾아다니며 회사를 매각하라고 요청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고 했다.

국내 중소·중견기업의 대다수 창업주는 자녀에게 가업을 승계할 것이냐, 회사를 매각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인 상속세 폭탄은 점점 더 많은 중소기업을 M&A 시장으로 내몰고 있다.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는 가업상속공제 제도는 회사 경영을 심각하게 제약할 정도로 요구 조건이 까다롭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이 제도를 활용하면 기업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업종 전환조차 추진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소형 공기청정기 제조회사인 A사가 자동차 부품회사에 최근 경영권을 매각했다. 지난 몇 년 새 농우바이오, 락앤락, 유니더스, 유영산업, 우리로광통신, 까사미아 등도 상속세 부담 탓에 경영 승계의 뜻을 접었다. 사모펀드가 경영 승계를 포기한 중견·중소기업을 줄줄이 인수하면서 이들 기업의 기술력 유지와 고용 보장 등도 위협받고 있다.

지난해 중견기업연합회가 134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서도 84.3%의 기업이 “가업 승계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강승구 중소기업융합중앙회 회장은 “수십 년 일군 회사엔 창업자의 사업 노하우가 배어 있고 이런 노하우는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다”며 “사업 및 인력 구조조정을 통한 차익 실현이 목적인 사모펀드 등에 넘어가면 창업정신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속세 폭탄 못버텨 회사 팔았더니…모두 부럽다며 박수 쳐주네요"

소형 공기청정기 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혀온 A사의 경영권이 최근 자동차 부품회사에 매각됐다. A사는 가정주부였던 L 대표의 눈물겨운 창업스토리와 함께 2003년 설립 후 매출 160억원대의 강소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유명해진 회사다. L 대표는 자신이 아픈 이유도 있었지만 상속세율이 최고 65%에 달하는 상황이어서 수년간 경영승계 수업을 받아온 딸(상무)에게 상속하는 대신 매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회사 관계자는 “수년 전 대형 화재도 버텨냈는데 상속세를 낼 수 없어 회사를 헐값에 넘겼다”고 토로했다. 자동차 부품회사인 인성엔프라가 A사 경영권을 인수한 가격은 100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상속세 때문에 회사 넘긴다”

L 대표는 가업상속공제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가업상속공제제도는 10년 이상 운영한 중소기업 등의 원활한 가업승계를 지원하기 위해 요건을 갖추면 상속세 산정 때 과세대상액에서 최대 500억원까지 상속공제를 해주는 제도다. 대상은 매출 3000억원 미만 기업이다.

경영 은퇴를 앞둔 대부분의 중견·중소기업 창업주가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막대한 상속세를 부담하면 가업 상속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가업상속공제제도가 있지만 활용하기도 어렵다. 요구 조건이 까다롭고 업종 전환 제한 등 현실 상황을 간과한 독소조항이 많다는 게 중소기업들의 한결같은 하소연이다.

무엇보다 ‘고용·업종·지분 10년간 유지’란 사후관리 요건이 업계 현실을 무시한 것이라는 비판이 많다. 상속 개시 과세연도 말부터 10년간 평균 정규직 근로자 수가 기준 고용 인원의 100% 이상, 중견기업은 120%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고질적인 인력난으로 고용 유지가 쉽지 않은 데다 대부분 업종은 공장 설비 자동화·무인화 등으로 직원 수가 줄어드는 추세인데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10년간 업종 변경을 제한한 것도 지나친 사후규제란 비판이 팽배하다. 상속지분에 대해서는 주식 처분을 할 수 없고 지분율 감소도 금지된다. 신규 자본투자가 원천봉쇄될 수밖에 없다.

국내 강소 수출기업들의 모임인 한빛회에 참석하는 기업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한동안 경영승계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회사 매각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현실적으로 경영승계가 어려워져서다. 최근 만난 강승구 한빛회 회장은 “누군가 ‘회사 팔았다’고 하면 ‘부럽다’면서 박수를 쳐준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각각 종자와 주방용품, 콘돔 분야에서 국내 1위 회사였던 농우바이오와 락앤락, 유니더스는 모두 승계를 포기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원천기술과 노하우도 맥이 끊기게 됐다며 관련 업계에선 안타깝다는 목소리가 넘쳐나고 있다.

유영산업, 우리로광통신 등도 대주주가 사모펀드에 회사를 매각했다. 까사미아 역시 지난해 1월 신세계에 경영권을 넘겼다.

“100년 기업 불가능” 하소연

승계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창업자들의 고민은 또 있다. 요즘 제조 분야 중소기업 경영에 관심이 없는 자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처럼 고생하기 싫으니 다른 일 하게 회사를 팔아서 돈이나 건물로 달라”는 것이다. 중소기업인들은 열악한 경영환경을 고려할 때 마땅한 설득 명분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인해 중소기업들은 점점 더 한계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강호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은 “평생 밤낮으로 일하며 사업을 일으켰는데 대물림해서 자식들에게 이 고생을 또 시켜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산타베어’ 인형으로 유명했던 완구업체 양지실업은 결국 승계 대신 폐업을 택했다. 1977년 설립 후 30년 이상 흑자 행진을 이어왔던 이 회사는 2세가 사업에 관심이 없고 전문경영인 영입에도 실패했다. 관련 업계에 양지실업을 인수할 만한 규모의 회사도 없었다.

조병선 중견기업연구원장은 “회사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투자할지를 고민해야 할 기업인들이 (상속과 관련해) 소모적인 고민에 발목이 잡힌 건 국가 경제적으로 큰 손해”라며 “이런 환경 속에선 100년 가는 기업이 절대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김진수/김정은/나수지 기자 likesmi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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