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탓에 이민 생각한다는 92세 노인의 한탄

입력 2019-05-20 17:39   수정 2019-05-21 09:57

현장에서

'부자들 脫한국' 보도 이후
포털에 5000여건 댓글 달려

오상헌 경제부 기자



[ 오상헌 기자 ] “내 나이가 올해 92세예요. 그동안 단 한 번도 우리나라 밖에서 산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이 나이에 이민을 생각하게 된 거예요. 평생 일군 재산을 자식들에게 온전히 물려줄 방법이 이거밖에 없다 보니….”

노신사의 전화를 받은 건 20일 오후 2시께였다. 그를 전화기 앞으로 이끈 건 <상속세 폭탄 무서워…부자들이 떠난다>는 한국경제신문 보도(5월 20일자 A1, 3면)였다. 한국의 과도한 상속·증여세(최고세율 65%)를 피해 상속·증여세율이 낮거나 아예 없는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민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청장년 시절 20년간 군인으로 복무했다는 노신사는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도전한 제조업과 공장 임대업 등으로 부(富)를 일궜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미리 재산 일부를 나눠줬지만 700억원 안팎의 회사 주식과 부동산은 여전히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노신사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이민을 알아보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이 나이에 해외로 나간다는 게 두렵지만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상속세가 없는 캐나다 밴쿠버를 1순위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정부가 세금을 제대로 쓴다는 믿음만 있어도 이민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가 낸 세금이 멀쩡한 보도블록을 교체하고 세종시처럼 국익을 해치는 사업에 쓰이는 데 질려버렸다”고 덧붙였다.

전화를 끊자 연매출 1000억원 안팎의 제조업체를 이끄는 중견기업인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싱가포르 투자이민 관련 정보를 듣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글로벌 시대에 국적이 뭐가 중요하냐. 기업은 세금, 법제도 등 경영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여기에 가업승계까지 고려하면 답은 뻔한 것 아니냐”는 답이 돌아왔다. 싱가포르는 상속·증여세가 없을 뿐 아니라 배당소득이나 이자소득에도 세금이 붙지 않는다. 근로소득세(최고 22%)는 한국(42%)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날 이민 관련 문의는 이렇게 하루 종일 이어졌다. 네이버에 게재된 해당 기사에도 5000건이 넘는 댓글이 달렸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 이민가는 사람을 질타하는 글보다는 ‘징벌적인’ 상속·증여세를 낮춰 가업승계를 유도하고 국부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글이 더 많았다. “중소기업을 하시는 아버지가 가업 승계를 고민하다 결국 포기했습니다. 세금 감안하면 문닫는 게 나아서입니다. 아버지 주변에 이런 분이 태반입니다. 20~30년 함께 일해온 공장 분들 모두 8월에 퇴사합니다. 부자만 죽는 게 아닙니다. 결국 다 죽는겁니다.”(아이디 yidg)는 식이다.

사실 상속·증여세를 낮춰야 한다는 주장은 재계와 학계가 입이 닳도록 얘기해온 주제다. 한국의 상속·증여세 명목세율은 최고 50%로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지만 최대주주는 30%를 할증과세하는 점을 감안하면 65%로 단연 1위다. 부작용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가업승계가 막힌 중견·중소기업 오너들이 회사를 팔고 있고 자산가들은 세율이 낮은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노르웨이 등은 상속세를 없앴지만 우리 정부는 2년 전 상속·증여세를 자진 신고할 때 감면해주는 세액공제율을 낮추는 정반대 길을 택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었다면 이런 결정을 했을까.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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