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학생까지 마구잡이 카드 발급…'신불자 400만명' 후폭풍 부르다

입력 2019-06-21 18:12   수정 2019-06-24 11:38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24) 2003년 신용카드 사태

'부자 되기 열풍'에 빠진 한국
'신용카드 소득공제'가 도화선
카드사 부메랑…연쇄부도 위기



[ 이태호 기자 ]
“국민이 다 아는 것을, 어떻게 내수 살리기 정책 탓이 아니라고 발뺌합니까!”

신용불량자가 400만 명을 향해 치닫던 2004년 10월 21일. 국회의원들의 호통 소리로 국정감사장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화근은 “김대중 정부 당시 신용카드 사용 촉진은 자영업자 소득 투명성을 높이려는 차원이지, 내수 진작 목적이 아니었다”는 경제 수장들의 답변 태도였다.

증인으로 출석한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과 전임인 진념 장관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의원들도 ‘국민이 다 아는’ 상식 말고 더 많은 과소비 조장의 증거를 대지 못해 속을 태웠다. 2000년대초 민간소비(소비성향)는 되레 1990년대 평균에도 못 미쳤고, 신용카드 증가의 기폭제였던 세제 혜택(소득공제)은 대다수 신용불량자와 동떨어진 정책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상식처럼 정부의 ‘최면’에 걸려 온 국민이 무리하게 카드를 긁어댄 게 아니었다면, 대체 왜 한국 카드산업에서만 신용불량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걸까.

그 해답을 찾으려는 이후의 많은 연구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급증했던 저소득층 가구로 눈을 돌린다. 2000년부터 2002년 사이 과당 경쟁에 뛰어든 카드사들이 무분별하게 현금대출(카드론, 현금서비스)을 확대하던 때. 대량으로 제도권 금융시장에 흘러들어온 한계 가구의 동시다발적 몰락이 2003년 대란의 원인이었다는 해석이다.

소득 양극화와 경기 회복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공식적으로 졸업한 2000년 전후 한국 사회는 ‘부자되기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경제위기와 중산층 붕괴의 상처는 청빈과 명예를 추구하던 전통적인 관념을 바꿔놨다. 서점가에선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2001년까지 2년 동안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배우 김정은 씨가 ‘부자되세요’를 반복해 외치는 비씨카드 TV 광고는 2002년 새해 덕담을 대신했다. 빠른 경기 회복도 새 천년에 대한 낙관론을 자극했다. 1999년 경제성장률은 11.3%에 달했고, 2000년에는 8.9% 성장했다. ‘닷컴 버블’과 부동산시장의 활기는 ‘재테크’라는 표현을 유행시켰다.

다른 한쪽에선 사업 실패와 대량 실직으로 실의에 빠졌던 저소득층이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1997년 25.4%에서 1999년 36.0%로 급증한 저소득 가구(중위 소득의 50% 이하)는 작은 가게를 열거나 일용직에 종사하면서 ‘평범한 아빠’의 꿈을 키웠다. 자영업자는 2002년 6월 말 사상 최대인 630만 명으로 1999년 이후에만 60만 명 불어났다. 국내 대표적 외식 사업가인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도 목조주택사업 실패를 딛고 일어나 2002년 ‘한신포차’를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한계 가구는 자기 소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생활비에 허덕이고 있었다.

‘쉬운 현금’의 등장

“잠깐 오셔서 카드 만들고 가세요.”

한계 가구에 마법처럼 손쉬운 현금 조달 창구가 등장한 것은 1999년 하반기였다. 정부가 그해 연말정산 때부터 ‘급여의 10% 이상 신용카드 결제’ 시 과세 대상 지표를 줄여주는 소득공제제도를 시행한 결과였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새 고객을 붙잡으려는 영업사원들이 길거리 가판대로 쏟아져 나왔다.

LG카드 삼성카드 등 카드사들은 별도의 소득이나 신용조사 없이 사은품과 현금을 나눠주며 카드 신청을 받았다. 고수익 부대업무이던 현금대출 서비스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는 전략은 신용이 나쁜 가입자를 선호하는 ‘역선택’을 자극했다. 카드사의 현금조달 비용인 카드채 발행금리는 연 10% 안팎인 데 비해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할부 금리(수수료)는 연 20% 안팎에 달했기 때문이다. 카드 연체율이 기록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인 2001년 일곱 개 카드사는 현금대출 수입 증가에 힘입어 총 2조5000억원의 순이익을 남겼다. 카드사 직원은 연봉의 50%에 달하는 성과급 파티를 벌였다.

카드사들의 역선택은 시간이 지날수록 통제 불능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존 카드 빚에 시달리는 고객에게 대환대출(기존 빚 상환을 위한 새 대출) 서비스를 권장하는 등 위험천만한 영업을 했다. 1999년 5월 현금서비스 한도를 자율에 맡긴(월 70만원 한도 폐지) 규제 완화는 도덕적 해이에 날개를 달아줬다.

많은 한계 가구가 카드 여러 개를 활용해 수천만원씩 대출을 받아 사업자금으로 쓰거나 생활비를 댔다. 인천에 사는 평범한 30대 주부 손지영 씨(가명)도 이 가운데 한 명이었다. 카드 빚은 가구공장 부도로 실직한 남편의 소득을 대신해 세 자녀의 양육비 역할을 했다.

과도한 팽창

“양적 팽창을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박근희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경영진단팀장은 2002년 상반기 경영진단(감사) 직후 이건희 회장에게 긴급 보고를 올린다.

박 팀장은 삼성카드 감사 과정에서 무서운 변화를 발견했다. 가입자(자산)가 빠르게 늘어나는 시기, 낮게 유지되던 연체율이 뒤늦게 폭증하는 기간경과 효과(seasoning effect)였다. 1999년 48조원이던 카드사들의 현금대출은 2002년 358조원으로 일곱 배나 늘어나 있었다. 기존 현금 결제를 대체하며 급증한 결제서비스(판매신용) 265조원보다 90조원이나 많았다. 같은 기간 경제활동인구 1인당 보유 카드는 1.8장에서 4.6장으로 늘었다.

정부가 2002년부터 부랴부랴 △미성년자 발급 제한 강화 △현금대출 취급 비중(50%) 제한 △길거리 회원모집 금지 등의 조치를 발표했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상황을 파악한 카드사들이 쉽게 내줬던 현금대출을 거둬들이자 사태는 더 험악해졌다.

카드 빚 독촉에 몰린 신용불량자들의 끔찍한 선택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독촉 전화가 겁나 전화기 코드를 뽑아놨다”던 손씨도 2003년 7월 세 자녀와 함께 인천의 한 아파트에 올라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당시 남편과 본인의 카드 빚은 4000만원 가까이로 불어나 있었다.

일순간 부도 위기로

“비상조치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

카드산업의 급격한 부실화는 2003년 3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를 촉매로 금융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발전했다.

당시 SK글로벌 사태 대책반장이던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국장은 SK그룹 관련 채권 환매가 카드채 환매로 확산하는 정황을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90조원에 달하는 시장에 카드채가 매물로 쏟아지면서 카드채 금리가 손 쓸 수 없는 속도로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기 도래 카드채를 상환할 추가 카드채의 발행 실패는 모든 카드사가 즉시 부도난다는 것을 뜻했다. 김 국장은 긴급 회의를 요청하고 비상조치를 준비했다. 며칠 뒤인 3월 17일 정부는 신용카드사의 자구 노력을 전제로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신용카드사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발 먼저 사태 수습에 나섰던 삼성카드는 삼성생명으로부터 5조원의 금융 지원을 약속받아 부도를 피했다. 국민카드는 독자 생존을 포기하고 모기업인 국민은행의 사업부로 흡수됐다. 외환카드와 우리카드도 2004년 모은행에 흡수 합병됐다. 업계 1위 LG카드는 그룹 지원만으로 회생이 불가능했다. 자금 지원을 둘러싸고 그룹과 채권단이 씨름을 지속하던 2003년 11월 21일에는 현금서비스 중단이라는 초유의 ‘LG카드 사태’로 이어졌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그해 말 LG카드 및 최대주주인 LG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 지분을 모두 채권단에 담보로 맡기면서 금융업과 결별 수순을 밟았다. LG카드는 나중에 산업은행의 단독 관리를 거쳐 2006년 신한금융그룹으로 넘어갔다.


신용버블의 붕괴

“밤을 새워서라도 답을 찾아내세요!”

신용불량자가 1998년 160만 명에서 400만 명을 향해 내달리던 2004년 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경제 관료들의 안일한 태도를 질타하며 신용불량자 사태의 조기 해결에 국정을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이헌재 장관은 이후 대대적인 실태조사를 벌여 3월 10일 ‘신용불량자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각종 신용회복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신용불량자는 2004년 4월 397만 명(카드 관련 비중 약 70%)을 정점으로 줄기 시작했다.

대다수 급여생활자에게 신용카드는 당초 활성화 취지처럼 세금을 아끼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부대업무인 현금대출의 고삐 풀린 성장은 외환위기로 한계에 내몰렸던 많은 가계를 고리대금의 늪으로 끌어당겼다. 대란의 정점이던 2003년 카드사의 실질 연체율은 28.3%에 달했다. 자영업자는 2003년 말까지 1년 반 동안 30만 명이 사라졌고, 같은 해 경제성장률은 3.1%로 추락했다.

‘부자되기 열풍’의 밑바닥에서 희망을 꿈꿨던 많은 가장들도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베스트셀러 종합 3위(교보문고)에 오른 2000년, 종합 1위는 외환위기로 직장을 잃은 아버지의 희생을 그린 소설 《가시고기》였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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