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개 한지 조각으로 '상징의 숲' 조성했죠"

입력 2019-11-14 17:14   수정 2019-11-15 00:11


한지 조형미술가 서정민 씨(59)는 작업이 풀리지 않고 막막할 때 프랑스 상징파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운문시집 <악의 꽃>에 수록된 시 ‘만물조응’을 읊조렸다.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 있는 기둥들은/ 간혹 혼돈스러운 말을 흘려보내니/ 인간은 정다운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건너 거길 지나간다’는 구절을 읽다 보면 어떤 초월적인 에너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시에는 주변의 공기를 자신의 온도로 물들이는 힘이 있었고, 그 힘은 다시 상상력으로 돌아왔다.

서씨는 지난 30여 년 동안 보들레르의 시를 청량제로 삼아 ‘자연이라는 향기와 빛깔, 소리가 상통하는 세계’를 한지 조형물에 풀어냈다. 생생한 육감으로 보이는 자연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조응을 꿈꾼 그의 작품들은 실험과 도전의 순간을 넘어 묘한 감동과 공감으로 다가온다.

경기 파주 갤러리 박영에서 최근 개막한 서씨의 개인전은 그가 한지를 활용해 자연과의 조응을 형상화해온 지난 30여 년의 작업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자리다. 이번 개인전은 서씨 작품에 반한 안종만 박영사 회장이 지난 몇 년간 국내외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를 빠지지 않고 찾은 뒤 성사됐다. 전시장에는 뾰족한 종이 물결이 공감각을 부추기는 설치 작품과 입체화 30여 점을 걸었다. 전시회 제목은 작가가 애창하는 보들레르의 시 구절에서 따온 ‘상징의 숲’으로 정했다.

14일 갤러리 박영에서 만난 작가는 “유행에 흔들리지 않으며 나만의 한지 조형 세계를 우직하게 구축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조선대 미대와 경기대 대학원을 졸업한 서씨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을 비롯해 네덜란드 인터알트갤러리, 스위스 바젤 젠코센갤러리, 싱가포르 부르노갤러리 등에 잇달아 초대되며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지난 9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아트 뮤지엄 이사가 그의 대작 ‘함성’을 사들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주로 동료 화가나 서예가들이 쓰다 버린 습작 한지를 재료로 활용했다. 젊은 시절 서예를 하는 지인의 작업실에 수북이 쌓여 있는 습작 파지를 ‘작품의 유전자’로 채택했다. 거기에 예술가들의 열정과 기운이 지문처럼 남겨져 있을 것이란 점에 주목했다. 촌스럽고 흔해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는 습작 파지를 화가들의 영혼을 쌓아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싱싱하게 요리했다. 재료에 대한 이런 생각은 그의 예술세계와 통한다. “전통 한지의 특성과 성질에 대한 집착, 습작에서 발견되는 치열함,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 재료를 다루는 진실함이 내 그림의 힘입니다.”

서씨 작품은 한지를 말아서 튜브 형태로 만든 다음 그것을 잘게 잘라 다시 화면에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수천 개의 종이 조각 절단 면에 쓰인 글자 및 그림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색상이 드러난다. 3차원적 조각과 2차원적 평면성을 교차시켜 리듬감과 역동성도 부여했다. 다른 예술가들의 땀과 열정이 한지 속에 가려져 볼 수 없는 상태지만 청각과 시각, 후각 같은 공감각의 형태로 피어난다. 다채로운 종이 조각의 물결은 보이는 너머의 세계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감각의 제국’을 세운 보들레르의 문학적 특질을 독창적인 시각예술로 승화한 게 이채롭다. 한지라는 매체를 사용해 조형세계를 구축한 서씨는 “내 작업은 격렬하게 폭발하고 발산한 뒤에 해소하는 게 아니라 더 조용해지고 담담해지는 것, 주장하기보다 성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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