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역사적 맥락 속의 브렉시트와 EU의 근본 문제

입력 2020-02-02 17:05   수정 2020-02-03 00:07

지난달 31일 드디어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했다. ‘브렉시트(Brexit)’가 일상어가 될 만큼 오래 끌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근년에 나온 정치적 사건 가운데 아마도 가장 중요할 터인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결과가 좋을 수 없다는 생각만 든다.

EU는 1951년 설립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자라난 것이다.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베네룩스 등 6개국이 참여했다. 영국은 참여를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다. 나치 독일에 성공적으로 맞선 유일한 유럽 국가라는 자부심과 주권의 일부나마 내놓는 것을 꺼리는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가 발족돼 성공을 거두자 영국은 1960년에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웨덴, 스위스와 함께 ‘유럽 자유무역연합(EFTA)’을 조직해 대응했다. EEC와 달리 이 기구는 초국가적 기구를 구성하지 않고 느슨한 연합에 머물렀다.

유럽의 핵심 국가들로 이뤄진 EEC가 크게 성공하자, 영국은 1961년 EEC에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러나 이번엔 영국에 비우호적인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거부했다. 1967년의 신청도 역시 드골에게 막혔다. 결국 1973년에야 영국은 EEC에 가입했다.

늦게 가입한 데다 자유주의 전통이 뚜렷한 나라라서 영국은 초국가적 EU 기구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컸다. 그래서 국경을 없애는 ‘솅겐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고 EU의 공용 화폐 유로가 도입된 뒤에도 자국의 파운드를 그대로 썼다. 그렇게 느슨하게 EU에 연결됐으므로 영국은 근년에 EU가 받은 충격들에 유난히 크게 흔들렸고, 결국 EU에서 나왔다.

첫 충격은 2008년의 금융 위기였다. 이 위기에 대응하는 정책과 고통 분담을 놓고 나라들의 이해가 엇갈리면서 EU가 크게 흔들렸다. 2015년 시작된 이민 위기는 EU의 고상한 이상과 비루한 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를 괴롭게 드러냈다. 영국의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에서도 이민에 대한 반감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탈퇴가 미칠 영향에 관한 논의는 주로 경제 분야에 집중됐다. 모든 전문가가 중장기적으로 영국이 부정적 영향을 받으리라고 본다. 4억5000만 명의 인구에 세계 총생산액의 4분의 1가량을 생산하는 EU는 영향이 훨씬 작을 것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군사적 영향이다. 영국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지녔다. 영국이 탈퇴하면서 EU는 군사적으로 아주 허약해졌다. EU에서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독일은 아주 빈약한 군대를 강화하는 대신, 러시아에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트해의 새로운 가스관(Nord Stream 2)을 계속 추진하는 데서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난다.

점점 위협적이 돼가는 러시아의 군사력에 맞서려면, 특히 크림반도의 불법 점령에 대한 제재를 유지하려면, EU는 군사력 증강에 나서야 한다. 불행하게도 동맹을 금전으로 환산하는 정책을 고집해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아래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약속도 약해졌다.

영국을 따라 다른 나라가 EU에서 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영국의 탈퇴는 EU가 안은 근본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유럽에선 그 위대한 제국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제국이 여러 번 나왔다. 따라서 유럽 사람들은 그런 꿈을 이뤄가는 EU를 자랑스럽게 여길 만도 하다. 실제로는 EU 회원국 가운데 주권을 EU 기구에 기꺼이 양도하려는 국가는 없다. 이처럼 제약된 충성심이 EU가 안고 있는 궁극적 한계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그런 충성심을 늘릴 길도 보이지 않는다.

가족에서 씨족과 부족으로 확대된 충성심은 민족국가에서 절정을 이뤘다. 그러나 그것보다 상위 사회에 대한 충성심은 아주 미약하다. 그 사실이 지금 너무 어지러운 국제 질서의 원인이다. 브렉시트는 그 사실을 아프게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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