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시·소설·음악…英 멀티맨이 그려낸 판타지

입력 2020-04-29 17:37   수정 2020-04-30 02:26

빼곡한 자작나무 숲을 헤치고 늑대 한 마리가 걸어온다.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고 전방을 향해 내딛는 앞발의 움직임이 더없이 신중하다. 목표물을 응시하는 듯한 두 눈에선 백색광을 내뿜는다. 늑대의 털도, 자작나무도, 숲의 바닥도 흰색 혹은 회색 톤으로 처리해 판타지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서울 안국동 리만머핀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영국 화가 빌리 차일디쉬(61)의 ‘자작나무 숲의 늑대’다.

차일디쉬는 멀티맨으로 유명하다. 화가라는 직업 외에도 사진작가, 시인, 소설가, 영화제작자, 가수, 기타리스트 등으로 수많은 장르에서 활동해온 영국 펑크·컬트 문화의 아이콘이다. 인생도 드라마틱하다.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조선소에서 일하다 미술을 시작했다. 17세에는 음악을 시작해 지금까지 150장 이상의 음반을 녹음했고, 40여 권의 시집과 5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2012년 갤러리현대에서 연 첫 국내 개인전에선 시인 이상과 춘원 이광수의 초상을 그려보여 주목받기도 했다.

6월 27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늑대, 일몰, 그리고 자신(wolves, sunsets and the self)’. 전시 작품은 7점에 불과하지만 성찰적이며 자전적인 그림과 글, 음악으로 잘 알려진 만큼 녹음이 우거진 풍경, 해질녘, 얼어붙은 호수 풍경, 꽃병에 담긴 국화와 아이리스 등을 묘사한 그의 작품이 전해주는 느낌은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차일디쉬는 미술, 음악, 문학 등 어떤 장르든 자신의 개인사와 일상에서 경험한 것을 소재로 작품을 완성한다. 풍경이든 정물이든 초상화든 몰입 상태에서 직관적이고 빠르게 그려내는 그의 작품엔 운동에너지가 가득하다. 나뭇가지를 묘사한 붓질에선 음악처럼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느껴지고, 배경을 묘사할 때 툭툭 두드린 듯한 붓 터치는 타악기의 리듬감을 연상케 한다.

빈센트 반 고흐나 에드바르 뭉크의 화풍을 닮은 차일디쉬는 특정 그룹 및 사조에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그의 작품 ‘자작나무 숲의 늑대’는 개와 비슷하지만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늑대처럼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자신을 상징하는 것일까.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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