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글씨로 인격 모독…대기업 사옥 앞 시위현수막 '공포'

입력 2020-05-31 17:14   수정 2020-10-12 15:24


지난 29일 서울 역삼동 GS타워 앞 도로변 가로수에는 길이 4m의 노란 현수막 네 개가 연달아 붙어 있었다. GS칼텍스 전 직원 김모씨가 해고를 철회하라는 요구 조건을 담아 걸어놨다. 현수막에는 ‘회장이 싸지른 똥’이라는 원색적인 표현도 담겼다. 주변 직장인들은 길을 지날 때마다 현수막에 눈길을 돌렸다. 직장인 박모씨(30)는 “자극적인 문구를 쓰면서까지 회사 앞에 현수막을 네 개씩이나 붙여 놓은 게 미관상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김씨는 이곳에서 2018년부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노조 대의원 등을 지낸 그는 2008년 무단결근 등의 이유로 해고됐다. 이후 부당해고 소송을 냈지만 2010년 4월 대법원에서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회사 관계자는 “대법원의 확정 판결까지 난 사안에 대해 김씨가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며 “시위 과정에서 회사 명예가 실추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기업들을 괴롭히는 건 막무가내식 시위만이 아니다. ‘회사의 얼굴’인 본사 앞에 빼곡히 붙은 현수막도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 대부분 붉은색 글씨로 기업 총수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문구가 쓰여 있다. 집회·시위 신고만 하면 현수막을 한 달 동안 걸 수 있는 데다 내용과 크기 제한도 없어 정부의 관리·감독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자동차 사옥 앞 인도에는 4년째 3.3㎡(1평) 남짓한 크기의 파란색 천막이 설치돼 있다. 천막 오른편에는 높이 약 2m 길이의 현수막 두 개가 휘날리고 있다. 현수막에는 ‘글로벌 악질기업’ 등의 문구를 포함해 그룹 총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쓰여 있다. 사측을 비난하는 입간판도 네 개나 세워져 있다. 천막과 인근 현수막을 설치한 전국금속노동조합 유성기업 지회는 현대차그룹이 유성기업의 노조파괴에 개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차 측은 “파업으로 인한 납품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성기업이 제공한 생산 안정화 계획을 살펴본 것”이라며 “노사관계에 개입한 게 아니다”고 반박했다.

기업 본사 앞 현수막과 천막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설치에 거의 제약을 받지 않는 현행 법규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법상 집회·시위를 신고하면 30일간 현수막을 걸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집회 신고를 하면 무기한 내걸 수 있다는 얘기다. 현수막 크기와 내용도 제한하지 않는다. 욕설과 속어까지 담긴 현수막이 난무하는 이유다. 서초구 관계자는 “천막 설치에 대한 판례를 검토하고, 법제처로부터 유권해석을 받아봤지만 천막이 도로 전체를 차지한 게 아니라서 강제철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양길성/최다은 기자 vertig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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