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파도에 떠내려간 월터의 아날로그 일자리

입력 2020-06-05 16:57   수정 2020-06-06 01:46


라이프 잡지사 사무실에 직원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자신을 구조조정 매니저라고 소개한 남자가 그들 앞에서 말을 꺼낸다. “이런 말씀 드리기 매우 어렵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면서 직원들의 눈치를 보더니 급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라이프지를 폐간합니다. 이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라이프 온라인으로 바꾸고 여러분 중 새로운 업무에 불필요한 분은 자리를 비워주셔야 합니다.”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수십 년을 이어온 라이프 잡지의 폐간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자리를 비워야 할 누군가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단 사실에 사람들의 초조함은 옅은 탄식으로 흘러나왔다. 그는 계속 이어나갔다. “누가 떠나야 할지는 마지막 호를 제작한 뒤 결정하겠습니다.”

월터, 구조적 실업 위기를 겪다

월터 미티(벤 스틸러 분)는 라이프 잡지사에서 16년째 근무 중인 사진 현상가다. 사진가들이 현장에서 찍은 사진필름을 보내주면 인화하는 작업을 도맡아 했다. 사진에 정교하고 세밀하게 마지막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그에게 라이프지의 폐간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사진 기술도 빠르게 디지털로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먼저 위협받는 자리에 있다는 걸 그 스스로도 직감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매니저의 연설이 끝난 뒤 한숨을 쉬며 그는 사진현상실로 터벅터벅 돌아간다.

월터는 ‘구조적 실업’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다. 구조적 실업은 산업 구조의 변화로 산업 간 인력 수급의 불균형이 생겼을 때 발생한다. 기술 진보로 산업 생산성이 향상되거나 새로운 산업이 태동하면서 저숙련 근로자가 도태되는 과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월터가 디지털화 물결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것 역시 구조적 실업으로 볼 수 있다.

구조적 실업 외에 실업의 종류는 원인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경기주기 변동에 따라 발생하는 실업을 ‘경기적 실업’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필연적으로 경기 호황과 불황을 넘나드는데 이에 맞춰 기업들은 일자리를 늘리고 줄이고를 반복한다. 이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실업을 경기적 실업이라 일컫는다.

근로자가 스스로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해, 혹은 정보가 없어서 아직 새 직장을 찾지 못한 상황을 ‘마찰적 실업’이라고 한다. 마찰적 실업은 다른 유형의 실업과 다르게 자발적으로 실업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발적 실업이라고도 한다. 이 외에 계절적 실업, 잠재적 실업 등 실업의 종류는 다양하다.


구조적 실업을 이겨내는 건 노동유연화

월터는 곧바로 위기에 봉착한다. 라이프지의 스타 사진가 숀 오코넬(숀 펜 분)이 보냈다는 사진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진에 ‘삶의 정수’가 담겼다. 라이프지의 마지막 호 표지사진으로 써달라”는 편지만 도착했을 뿐이다. 숀의 편지 내용은 구조조정 매니저들의 귀에도 들어가 이 사진이 무엇인지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구조조정 대상 심사가 이뤄지는 기간에 최악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고지식한 여행가 숀은 연락할 휴대폰도, 메일도 없다. 월터는 숀을 찾아내 사진의 행방을 밝혀내야만 했다. 월터는 용기를 냈다.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아프가니스탄 세계 곳곳의 숀이 있을 법한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바다에 빠져 상어에게 위협당하고, 폭발하는 화산을 피해 달아나는 등 갖가지 위험을 무릅쓴다. 그렇게 결국 월터는 사진을 찾아낸다.

하지만 월터에게 날아온 것은 결국 해고통지서였다. 월터의 목숨을 건 사투에도 월터가 해고 대상자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 현실이었다. 디지털로 바뀌는 흐름 속에서 아날로그 인력의 노력은 중요하지 않다. 구조적 실업은 산업변화에 의해 불가역적으로 발생하는 실업이기 때문이다.

구조적 실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업이 근로자를 더 쉽게 자름으로써 더 쉽게 채용할 수 있게 해준다. 노동유연화다. 산업이 구조적으로 변화하면 부문별로 노동에 대한 수요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지는 산업에서는 노동 수요가 줄어들 것이고, 뜨는 산업에서는 노동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노동이 유연해지면 수요가 적은 곳에서 많은 곳으로 일자리는 탄력적으로 수급될 수 있다.

구조적 실업을 노동유연화로 잘 대처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하르츠 개혁’이다. 동독 지역은 1990년대 말로 들어서면서 20%를 넘나드는 극심한 실업률에 시달렸다. 통일 초기 인프라 투자로 호황이었던 건설업이 점차 자리를 잃게 되자 건설업 전반의 구조조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에 독일 정부는 2003년 하르츠 개혁을 시행한다. 하르츠 개혁의 요지는 시간제 근로자 확대다. 이른바 ‘일자리 나누기’다. 좀 더 유연화된 미니잡(mini job)인 시간제 일자리를 필두로 노동유연화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동독지역 실업률은 2011년 말 10.4%까지 하락하게 된다. 즉, 잘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한 노동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직장에 오래 버틸 수 있게 고용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일어서는 산업에서 그가 쉽게 채용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해결책이다. 월터를 자른 매니저를 탓할 것이 아니라 월터가 새로운 직장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게 중요하단 얘기다.

새로운 도전이 실업을 이겨내는 길

물론 그들을 쉽게 자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유연한 노동시장을 갖추지 못한 사회에선 특히 그렇다. 이에 ‘노동유연안정성(flexicurity)’이란 개념이 등장했다.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을 결합한 용어로, 쉽게 말해 국가가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실업자가 돼도 안심할 수 있는 구조를 세운 뒤 그 위에서 노동유연화를 추구하는 전략이다. 노동유연화가 안 된 한국을 겨냥해 국제통화기금(IMF)이 단골로 던지는 정책 제언이기도 하다.

월터는 해고된 뒤 실업수당을 받기로 하고 회사 문을 조용히 걸어나온다. 그러다 직장 동료 셰릴(크리스틴 위그 분)과 마주친다. 그와 함께 자신이 사진을 찾기 위해 했던 여행 이야기를 한다. 사진을 찾기 위해 아이슬란드에서 스케이드보드를 탔던 이야기, 그린란드에서 술에 취한 조종사의 헬기에 탄 이야기 등을 되짚었다. 돌이켜보면 순간순간 월터는 도전했다. 물론 그는 도전을 통해 기존 직장을 지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도전을 통해 얻은 용기로 그는 새로운 직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실업의 좌절에 빠진 이에게 가장 큰 치료제는 또 다른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구민기 기자 ko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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