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현실 참여' 작가들…세월만큼 그림도 깊어졌다

입력 2020-07-07 17:34   수정 2020-07-08 00:55


약칭 ‘현발(現發)’로 불리던 ‘현실과 발언’은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을 이끈 동인 그룹이다. 1980년 창립한 현발은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기성 체제에 침묵하지 않고 미술을 통해 현실과 소통하고자 했다. 현발이 1990년 공식 해체를 선언한 뒤 회원들은 각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다양하게 활동해왔다.

현발 옛 회원들이 다시 뭉쳤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림과 말 2020’전에서다. 창립 당시 청년에서 60~70대가 된 이들은 이제 그림으로 어떤 말을 할까. 어떤 말을 그림으로 표현할까. 이번 전시에는 김정헌 김건희 민정기 성완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강요배 노원희 박불똥 박재동 안규철 이태호 임옥상 정동석 주재환 등 16명이 회화, 판화, 조각, 설치, 사진 등 106점을 내놓았다. 현발 활동 당시의 작품과 근작들을 함께 전시해 흘러간 세월만큼 달라진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전시장을 둘러보니 현실사회를 향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고 예리하되 표현 방식은 부드럽고 깊어졌다. 1980년 군사정권의 공포를 당시 처음 나온 ‘쭈쭈바’의 광고 문구로 풍자한 ‘얼얼덜덜’을 선보였던 김건희는 지난해 그린 촛대바위 연작을 걸었다. 동해안의 촛대바위 풍경이 좋아서 자주 찾아갔다는 그는 김홍도의 ‘금강사군첩-능파대’를 재해석한 ‘금강사군첩 중 촛대바위’에서 원작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생략하고 바다로 이어지는 길 위에 ‘나는 누구인가. 단원은 누구인가’라고 썼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제주 4·3항쟁을 알리는 역사화 연작을 제작한 강요배는 “제주의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나니 주제의 자연이 달라 보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늦가을 제주 오름의 벌판에 핀 물매화와 들꽃의 자줏빛을 표현한 2011년 작 회화 ‘노야(老野)’를 선보였다.

김정헌은 민화풍의 전통산수화를 배경으로 달리기하는 노인을 통해 건강과 행복한 미래를 이야기한 1982년 작 ‘행복을 찾아서’와 함께 ‘갈등을 넘어 녹색으로’(2019) 등 6점을 내놓았다. ‘갈등을 넘어 녹색으로’는 폐공장을 배경으로 가운데 녹색의 큰 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 작가는 “생산과 소비에 관해 우리 사회가 갖는 모순적 상황을 갈등을 넘어 녹색의 힘과 대비시켰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까지 추상을 그린 손장섭은 1980년대가 되자 사회문제와 정치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반추상을 시도했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1981년 작 ‘역사의 창-광화문’은 광주항쟁의 충격 속에서 제작한 회화다. 2000년대 이후 신목(神木)과 자연 풍경을 주로 화폭에 담아온 그는 수령 2500년을 자랑하는 국내 최고령 나무를 그린 ‘울릉도 향나무’(2012)도 함께 내놨다.

임옥상은 흙에 귀의한 듯하다. 자신의 전 작품을 꿰뚫는 주제 의식이 ‘기운생동’이라는 그는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빌리지 않고 오로지 나의 신체 리듬(박동)과 호흡, 기운으로 나를 전유하고 싶다”며 “이 중심에 흙이 있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2018년 작 ‘흙A4’ ‘흙A5’는 캔버스에 흙과 먹으로 그린 세로 2m, 가로 3.5m의 대작이다.

물론 비판적 의식도, 표현도 여전히 펄펄한 작가들이 있다. 역사 이념논쟁을 비판한 박불똥, 휴지와 폐비닐 등을 사진으로 담는 성완경,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기려온 신경호, 산업재해 피해자들에게 주목한 ‘무명 사망 근로자를 위한 비’(2020)를 내놓은 조각가 이태호 등이 그렇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이들은 그림과 말에 대해 어떤 말을 할까.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미술이 말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된 지금, 미술은 과연 해야만 하는 말을 하고 있는가. 이제는 오히려 말을 가리고 아껴서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할 시간이 아닐까”라고 했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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