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운명을 바꾼 전화 한통 "프랑크푸르트로 사장단 집합하라"

입력 2020-10-25 17:26   수정 2020-10-26 01:40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일생은 도전과 혁신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말렸던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 세계 1위로 키워냈고, 일본에 뒤처졌던 TV와 스마트폰에선 추종을 불허할 만큼 격차를 벌렸다. 이 회장은 중요한 순간마다 남다른 통찰력으로 결단하고, 고비 때마다 특유의 경영철학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한국경제신문은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키운 ‘이건희 경영학’을 신경영과 인재경영, 디자인경영 등으로 나눠 분석한다.

1993년 6월 5일 일본 도쿄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루프트한자 1등석. 이 회장은 이륙 후 골똘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당시 삼성전자 고문이었던 후쿠다 씨와 기보 씨가 작성한 보고서였다. 후쿠다 보고서는 디자인과 관련된 내용이고, 기보 보고서는 사업장 관리에 관한 것이었다.

후쿠다 고문은 ‘상품을 디자인할 때 A안, B안, C안이 출발부터 개념이 다른데도 삼성의 윗사람들은 적당히 섞어서 제품을 만들라고 지시한다’고 썼다. ‘느닷없이 사흘 안에 디자인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기보 씨는 ‘공장에서 콘센트가 발에 걸리적거려도 정리할 생각을 않고 무심히 지나친다. 이런 기본적인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 회장은 보고서를 본 뒤 수행 임원들을 불렀다. “일본인 고문이 올린 보고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기내에서 삼성의 변화와 개혁의 당위성을 7시간 동안 쉼없이 설파했다고 한다. 독일에 도착한 뒤 숙소인 켐핀스키호텔에서도 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삼성 사내방송(SBC)팀이 만든 30분짜리 비디오가 이 회장에게 전달됐다. 세탁기 뚜껑 규격이 맞지 않자 근로자들이 칼로 깎아내는 장면을 본 이 회장은 격노하며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녹음하세요. 질(質)경영을 그렇게도 강조했는데 이게 그 결과입니까. 사장들과 임원들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세요.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설 겁니다.”

이 회장의 트레이드마크 ‘신경영’은 그렇게 시작됐다. 단순히 하루이틀 생각한 게 아니라 10년 이상 후계자 수업을 받고, 5년간 회장직을 맡고 난 뒤 쌓였던 고민과 열정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한 말에 그의 뜻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 변해야 산다
기업은 사업 구조의 변화와 혁신을 추구한다. 바뀌지 않고선 경쟁에서 도태된다. 디지털 대응에 뒤처진 소니와 스마트폰 혁명에 적응하지 못한 노키아가 그랬다.

이 회장의 혁신 방식은 다른 경영자들과 달랐다. 먼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의식부터 바꾸자”는 데서 출발한다. 사업이나 구조로 혁신을 시작한 게 아니라, 의식의 근원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런 철학은 “이기주의만 없애도 단합이 되고, 힘을 합치면 어떤 일이든 이 지구상에선 일등을 해낼 자신이 있다”는 이 회장의 말에 잘 담겨 있다.

이 회장은 혁신하면서 잘못된 관행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뒷다리 잡지 말고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자고도 했다. 그러면서 “서로 믿을 수 있을 때 변할 수 있다”며 “한 방향으로 가자”고 변화의 방향을 제시했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은 단번에 기업문화가 바뀌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그가 주창한 변화는 일종의 문화혁명 같았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의식이 변하기 시작하면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1993년 8월 전격적으로 ‘7·4제’를 시행했다. 오전 7시 출근하고 오후 4시 퇴근하는 이 제도가 시행되자 임직원들은 이 회장의 개혁 철학을 체감하게 됐다. 1995년 공채에서는 학력 제한을 철폐했다. 성차별 해소를 위해 여사원 근무복을 없앴고, 전 직원을 대상으로 연봉제를 실시했다. 1994년 문을 연 삼성의료원은 한국의 영안실 문화를 확 바꿨다. 이 같은 변화는 점차 재계로 확산됐다.

(2) 質경영
‘품질경영’은 이 회장의 또 다른 화두였다. “세계 일류가 되면 이익은 지금의 3~5배 난다. 1년간 회사 문을 닫더라도 불량률을 없애라”는 이 회장의 말에도 삼성 조직은 꼼짝하지 않았다. 1960~1970년대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던 시절을 겪은 경영진에겐 ‘어떻게든 많이 만들면 된다’, ‘양이 최고다’라는 의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1993년 6월 15일 이 회장은 “질로 가서 점유율이 떨어지고 적자가 나도 좋다. 적자가 나면 내 사재라도 털겠다”며 10여 시간 이상 열변을 토했다. 강의 직후 당시 이수빈 삼성그룹 비서실장이 여러 사장과 함께 이 회장 방을 찾아왔다. “회장님, 아직까지 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앞뒤입니다.” 그 순간 이 회장은 손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참석자들은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른바 ‘스푼사건’이다.

이때부터 본격화된 질경영은 ‘불량제품 화형식’으로 이어졌다. 1994년 삼성전자 무선전화기사업부는 제품 출시를 서두르다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1995년 1월 이 회장은 불량품을 무조건 새 제품으로 바꿔줄 것을 지시했다. 그해 3월 9일 수거된 15만 대의 전화기를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았다. 2000여 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머를 든 10여 명이 전화기를 내리쳤다. 이후 산산조각이 난 전화기를 불구덩이에 몰아넣었다. 잠자는 사람에게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는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불량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 뒤 삼성의 불량률은 낮아졌다. 1994년 4위에 그쳤던 삼성 무선전화기의 국내 점유율은 1995년 1위(19%)로 상승했다.

삼성 스마트폰을 세계 1위로 이끈 주역 중 하나인 갤럭시S3가 출시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2012년 5월 갤럭시S3가 나오기 3주 전, 뒷면 커버의 질감이 초기 기획 단계 때보다 떨어졌다. 10만 개의 커버가 생산된 상태였고 수출을 앞둔 갤럭시S3가 비행기에 실려 있었다. 하지만 10만 개의 재고는 모두 폐기되고 교체됐다.
(3) 복합화 정보화 국제화
이 회장은 복합화, 정보화, 국제화를 줄기차게 역설했다. 정보화와 국제화는 지금은 보편화된 개념이지만 1990년대만 해도 생소했다. 이 회장은 “1980년대에는 국내에서 챔피언이면 챔피언이었다. 지금은 세계에서 챔피언이라야 챔피언이다”라며 국제화를 강조했다.

이 회장이 제시한 복합화 개념도 독특했다. 이 회장은 복합화를 ‘누운 것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장과 식당, 집 등을 100층짜리 빌딩에 모아놓으면 효율이 높아질 것으로 판단했다. 이 회장은 “100층이든 80층이든 빌딩에 기획, 디자인, 설계, 판매 등 각 조직 담당자가 모두 입주해 있다면 필요할 때 40초면 회의실에 모일 수 있다”고 빌딩 복합화의 예를 들었다. 복합화는 빌딩뿐 아니라 도시 공장 병원 등에도 적용되는 개념이었다.

삼성이 수원, 화성, 아산 등에 대규모 용지를 확보한 뒤 공장과 연구시설, 병원, 학교 등을 넣어 대단위 복합단지로 개발한 것은 이 회장의 이런 발상에서 비롯됐다. 복합화된 대단지를 이룬 삼성은 제품 개발부터 양산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피드 경영’으로 혁신에 혁신을 거듭해왔다.

송형석/황정수/이수빈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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