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기억] ⑥30년전 西청년…"장벽붕괴때 '서부개척시대' 열린 느낌"

입력 2019-01-26 08:00  

[서독의 기억] ⑥30년전 西청년…"장벽붕괴때 '서부개척시대' 열린 느낌"
안드레아스 베셀-테하른 신연방주 정치·교육 담당관 인터뷰
"희열의 순간…통일 앞두고 낙관주의 팽배"
반세기 전 서독 기성세대, 사회비판적 젊은이에게 "동독으로 가"
"청소년기 西 거주지역 경제위기로 東 지원 반갑지 않아"
"분단시절 동독 방문, 교류협력·관계개선 피부로 체험"
"'라인강의 기적'만으론 對동독지원 이유 설명 안 돼"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봅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앞으로 1년간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갑니다.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을 주제로 한 첫 시리즈로 6개의 기사를 6일간 연재 중입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① 장벽만큼 높던 '서서갈등'의 해빙…東西공존 아우토반 닦아
② 동독의 '봉' 서독, 대가는 시민편익…경제의존도 키워
③ 서서갈등도 '상호성·인권'…불신임투표·위헌소송까지
④ 박명림 "남남갈등 풀려야 대북정책 지속…비핵-북미수교 교환해야"
⑤"南, 시민 北방문자유 허용해야"…15년 獨통일硏소장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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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통일을 앞두고 서독에 낙관주의가 팽배했습니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처럼 금광, 금맥을 발견한 듯한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동독에 시설과 물자가 많이 부족해 경제적으로 기회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최근 베를린의 연방경제부 청사에서 안드레아스 베셀-테하른(60) 연방경제부 신연방주특임관실 담당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이 현실화했을 당시의 분위기를 이같이 전했다.
옛 서독지역에서 청소년기인 1970년대에 동서독 교류·협력을 지켜보던 느낌과, 변호사로서 왕성히 활동하던 30세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의 생각을 묻기 위해 그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지금 옛 동독지역인 신연방주의 정치·교육·과학 정책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베셀-테하른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날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독일인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라며 "희열의 순간이 지난 이후에도 우려가 크지 않은 분위기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학창시절에는 동독이 반가운 존재만은 아니었던 때가 있었단다.
"1970년대 중반인 16세쯤이었는데, 당시 사회지리학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동독이 경제적으로 결핍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때 저는 손을 들고 '정말 그렇게 문제가 많다면 서독이 동독과 통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지역은 루르 공업지대로 사양산업이 많아 구조조정 같은 현안이 산재해 있어서 우리 경제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베셀-테하른은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신동방정책에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서독에 유행하는 기성층의 사고방식이 있었는데요. 젊은이나 학생들이 사회 현상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면 '너 그렇게 생각하면 동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동방정책이 성공하면 이런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우베 슈멜터 독한협회 회장이 지난해 11월 베를린 윤이상 선생 자택에서 열린 '윤이상 구명운동 50주년 기념 평화 토크 콘서트'에서 '68 학생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와 관련해서 했던 말과 비슷하다.
슈멜터 회장은 "(신동방정책이 추진되기 직전인) 1967∼1969년 당시 20대인 저희 세대와 부모 세대가 완전히 분열했다"라며 "신동방정책에 대한 의견도 있었는데, 부모와 대화를 하면서 동독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동독으로 가든지'라는 반응을 보여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언급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향의 명절 밥상머리에 대북정책이 화두로 올라갔을 때 비슷한 유형의 대화를 겪은 사람들이 많을 터다.


베셀-테하른은 "사회민주당 소속의 빌리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을 놓고 대규모의 논쟁과 갈등이 있었다"라며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된 1972년에 13세에 불과했지만, 논쟁 상황을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회적 테마였다"고 회상했다.
'경제적으로 발전하던 서독 사회에서 동독 문제에 무관심하던 경향이 없지 않았냐'는 질문에 베셀-테하른은 "그렇지 않다. 기독민주·기독사회당 같은 보수정당과 실향민 단체는 동독 관련 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동서독 적대적 관계에 따른 긴장도 있었다"고 답했다.
이와 관련해 학창시절 개인적인 일화도 소개했다.
"사회지리과목 담당교사가 보수정당인 기독민주당 지지자였는데, 기본조약 이후 교통협정이 맺어지고 동독에 경제적 지원을 할 때 '우리가 왜 동독과 소련이 탱크를 만드는 데 돈을 퍼주느냐'고 분노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1980년대에는 조금 상황이 변했단다.
"1980년대에는 동독에 대해 많이 무관심해졌습니다. 신동방정책이 성공해 동독과 교류·협력이 일상화됐기 때문입니다. 동독은 더 이상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동서독에 중거리핵미사일 배치 문제로 1980년대 한두 번 군사적 긴장 상황이 벌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신동방정책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보수 정치인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기독사회당 대표가 1983∼1984년 동독에 차관 제공을 주선한 것만 보더라도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보수정당인 기독사회당이 오히려 '가까스로 연명하는 동독 체제에 호흡기를 달아준다'는 비판을 보수진영 일각에서 받기도 했지만, 기독사회당은 차관 제공을 밀어붙였습니다."
베셀-테하른에게 여론조사기관 알렌스바흐의 조사결과에 대해 해석을 부탁했다. 1971년 8∼9월 2천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독일이 한 국가로 사는 것이 최선이냐'는 질문에 60%가 '그렇다'고 답변한 내용이었다.
베셀-테하른은 "당시 그런 설문이 있을 경우, 통일이 금방 실현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며 "현실적으로 통일이 될 수 있느냐와 통일을 원한다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분단기 동독을 방문할 때 동서독 교류·협력의 심화와 지속적인 관계 개선을 피부로도 체험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83년에 베를린을 처음 방문했는데, 동독 당국에 검문을 받을 당시 상당히 긴장되고 위압적인 느낌이었는데 1986년에 갔을 때는 그런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동독을 다녀온 후 동독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쳤는지 질문을 던졌다.
"동독의 경제 상황에 대해 눈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백화점에서 계산기가 주요 전시물로 진열돼 있고 400마르크에 팔고 있더라고요. 계산기 같은 것은 서독에선 다른 전자제품을 살 때 서비스 상품으로 끼워주던 것이었는데요. 서독 백화점에는 컬러텔레비전만 전시돼 있는데, 흑백텔레비전이 7천 마르크의 가격을 달고 전시돼 있더군요."


독일 통일 전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넘어왔을 당시 서독 내 갈등 양상이 있었는지 물었다.
"논란과 갈등은 거의 없었습니다. 헌법 격인 기본법에 따라 처음부터 동독 시민들은 독일인이었습니다. 당시 탈동독민을 위한 특별법을 새로 만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독의 연금보험, 실업보험 등에 그대로 가입이 돼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1960년대 경우에는 서독에 노동력 부족 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환영했던 점도 있었습니다."
당시 서독이 동독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탈동독민에 대해서도 동독에서의 연금납부 등을 인정한 것 등이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적 번영 때문이 아니었는지 물었다.
"경제 문제로는 전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당시 라인강의 기적이 분명히 있었고, 대(對)동독 지원 문제에서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도록 기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석탄 등 사양산업 문제가 컸고 경제위기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통일 이후인 1990년대에는 경제적 확장기였고 전문인력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대내외적 상황으로 경제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연방경제부 청사에서 만난 그의 왼쪽 가슴에는 한-독 국기 배지가 달려있었다. 베셀-테하른은 특파원에게도 이 배지를 선물했다. 개인적으로 인터넷에서 구매했단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는 현재 매년 열리는 한독자문회의의 독일 측 운영관리자이기도 하다.

#서독의기억 #서서갈등 #남남갈등 #동서독교류협력 #한반도교류협력 #독일통일 #한반도통일
lkb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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