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날벼락 맞은 기분…이제 사과 농사 못 지을 것 같아"

입력 2019-06-11 10:51  

[르포] "날벼락 맞은 기분…이제 사과 농사 못 지을 것 같아"
올해 강원서 첫 세균병 덮친 사과 농가…모든 나무 뽑아서 매몰
"사과나무 언제 다시 키우나"…나무와 함께 묻은 노년의 꿈



(춘천=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가지가 시들하길래 약을 쳤는데 낫질 않더라고. 이렇게 독한 병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지난 10일 오후 강원 춘천시 남산면의 한 사과 농장. 독한 병이 이곳을 덮쳤다. 농부의 손길 대신 중장비가 농장을 할퀴더니 결국 모든 나무는 뿌리째 뽑혔다.
이곳에서 12년째 사과 농사를 짓던 황철근(85)씨는 농장 구석에 깊이 묻히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노년의 꿈도 함께 묻었다.
병의 시작은 별로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황씨는 지난달 말 농사일을 하던 중 시들고 말라버린 나뭇잎들을 발견했다. '소독하면 낫겠지'라는 마음으로 약을 뿌렸다.
하지만 잎과 가지가 말라가는 증상은 낫지 않고 점차 번졌다. 3차례나 소독을 해도 소용없었다.



농업기술센터에 신고하니 직원들이 부리나케 농장을 찾아왔다.
센터 관계자들은 나무에서 시료를 채취하더니 농장 주위로 '출입금지'가 적힌 노란 띠를 둘렀다. 그들은 황씨에게 "농촌진흥청에서 정밀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닷새가 지났다. 황씨는 초조함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과수 화상병일 수 있다고 얘기했다. '과수 구제역'으로 불리는 화상병은 과수 농가에 치명적인 병이다.한 그루만 병에 걸려도 농장을 닫아야 할 정도다.
결과는 '가지검은마름병'이었다. 화상병 만큼은 아니지만, 농가에 큰 피해를 주는 과수 세균병이다. 나무의 잎과 줄기가 검게 마르는 이 병은 마땅한 약제가 없다.
과수 농가에 이 병이 발생했을 때 감염 나무가 전체의 10% 이상이면 폐원 조치하며, 그보다 적으면 발병 나무를 포함해 인근 나무 8그루를 매몰 처리한다.



이 농가는 사과나무 445그루를 기르고 있다. 조사 결과 60그루가 병든 것으로 나타났다. 발병률은 약 13.5%. 황씨는 농장 문을 닫아야 했다.
곧 굴착기 2대가 와서 농장을 갈아엎었다. 중장비는 무심하게 모든 나무를 뽑아내 농장 구석 깊이 묻었다. 그 위로 다시 흙이 덮이고 석회가 뿌려졌다.
황씨는 12년 전 노년의 꿈을 갖고 이 농장을 꾸리고 미니사과 품종인 '알프스오토메'를 길러냈다. 묘목이 자라 상품성 있는 사과를 수확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
나무는 그가 땀 흘린 만큼 결실을 선물했다. 지난해에는 사과 10t을 생산했다. 많지 않은 돈을 손에 쥐었지만, 그는 만족했다.
황무지가 된 농장을 바라보는 그는 바짝 마른 가지보다 더 가슴이 말라 갔다.
이제 다시 사과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까닭이다.
가지검은마름병에 걸린 농장은 3년 동안 사과나무를 심을 수 없다. 3년 뒤에 다시 묘목을 심는다 해도 내다 팔 만한 사과를 길러내려면 총 10년가량 걸린다.
그때 황씨의 나이는 95살이 된다.
그는 "이 나이에 무슨 사과 농사를 다시 짓겠냐"며 "콩이나 들깨를 심으면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라고 토로했다.



가지검은마름병은 강원도 내에서는 1995년 춘천과 화천에 처음 발생했다. 당시 농가 29㏊가 피해를 봤다.
2008년까지 꾸준히 발병하다가 이후 5년 동안 잠잠해졌지만 2014년부터 춘천, 홍천, 횡성, 철원 등 영서지역 과수 농가를 다시 덮치기 시작했다.
이날 폐원 처리된 농가는 올해 강원지역에서 첫 과수 세균병을 확진 받은 곳이 됐다.
정부에서 농가 운영 기간, 나무 수 등을 따져 보상 절차에 들어가겠지만, 춘천에서 사과와 함께 길러오던 노년의 꿈은 나무와 함께 땅속 깊이 묻혀버렸다.
yangdo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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