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4년] ③ 일본, '피해자'로 기억되고 싶은 혼돈의 가해자

입력 2019-08-14 07:00  

[광복 74년] ③ 일본, '피해자'로 기억되고 싶은 혼돈의 가해자
전쟁 책임 규명 미완 속 가치관 혼란…가해자 인식 옅어져
日 지식인들 "개헌 추진 아베 정권, 역사적 진실 마주해야"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수십 년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결코 잊어선 안 될 역사는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 아닐까요?"
이는 간토(關東)대지진과 태평양전쟁 때의 미군 공습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함께 추모하는 시설인 도쿄도위령당에 가면 접할 수 있는 메시지다.
한국인이 광복절로 기리는 8월 15일은 일본인에게는 태평양전쟁 '종전일'이자 '패전일'이다.
지금으로부터 74년 전 정오, 잡음이 뒤섞인 라디오에 일본 국민은 귀를 기울였다.
히로히토(裕仁) 당시 일왕이 육성으로 읽어 내려간 '종전(終戰)의 조서(詔書)'를 듣기 위해서였다.



"짐(朕)은 세계 형세와 제국(일본) 현실을 고려해 특단의 조치로 시국을 수습하려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민(臣民)에게 고한다. 제국 정부가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4개국에 공동성명(일제에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했다."
'패전'에 대한 인정 없이 그저 2차 세계대전 승전 4개국의 공동성명을 '수락'한다는, 어이없는 내용을 담은 '종전의 조서'를 일왕이 발표함으로써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막을 내렸다.
아울러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군국주의로 치달았던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는 등 기나긴 세월 동안 계속했던 주변국 침략전쟁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지만, 이 조서에 담긴 엇나간 인식은 이후 7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일관계를 비롯해 일본과 아시아의 여러 피해국 사이의 관계를 왜곡하는 실마리가 됐다.
올해에도 8월 15일을 앞두고 일본 언론 매체에는 8월 6일의 히로시마(廣島), 8월 9일의 나가사키(長崎) 원폭 투하 참상을 조명하고,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다채로운 기획물이 선보였다.
이들 기획물을 관통하는 큰 주제는 평화의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왠지 꼭 다뤄야 할 것으로 보이는 게 빠져 있는 느낌이다.
다름 아닌 일본 국민의 '소중한 평화'를 파괴한 주체에 관한 조명이 없다. 원인이 없는 결과만 다루는 모양새인 것이다.
매년 일본의 청소년들이 이 무렵이면 핵무기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들고 유엔 등 국제기구를 방문하는 것이 연례행사가 됐지만, 여기에도 평화 파괴의 주체는 없고 원자폭탄 피해의 참상을 강조하는 '이미지 홍보'만 있다.




군국주의를 좇던 일제의 여러 침략전쟁에 따른 인명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중국 정부가 작성한 통계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희생된 중국 군인 사상자가 약 330만명, 민간인 사상자는 800만명이라고 한다.
한국,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와 위임통치령 지역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이 희생됐다.
특히 일제 징용령으로 1944년까지 당시 한반도 인구의 16%가 동원된 것은 주지의 역사적 사실이다.
이들이 겪었던 고통은 오늘날까지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위안부 할머니들의 절규와 지난해 징용 피해자 배상에 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로 이어졌다. 이는 '가해자로서의 과거사'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려는 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주도의 일본 정부 태도와 맞물려 큰 분쟁 요인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역사적인 가해자의 책임 의식이 '우리도 피해자'라는 의식과 한데 섞여 희석되는 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4년여간의 태평양전쟁으로만 숨진 일본인은 민간인과 군무원을 포함해 일본 정부 집계로 약 310만명이라고 한다.
군인이 대부분인 미국 측 희생자(9만여명)와 비교하면 일제가 얼마나 무모한 전쟁을 벌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일본은 1945년 3월 10일 소이탄을 동원한 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도쿄 곳곳이 불바다가 되면서 수 만명이 숨졌고, 그해 8월 종전 직전에는 인류 최초의 원폭 공격을 2차례나 받아 수많은 인명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런 참상은 '우리도 피해자'라는 인식을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하는 주된 배경이 되고 있다.
도쿄도 스미다(墨田)구 요코아미(橫網)초 공원에는 도쿄도위령당이라는 추모 시설이 있다.
이 위령당은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대지진 당시 희생된 5만8천여명과 1944년 겨울부터 이듬해 8월까지 진행된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숨진 10만5천여명의 넋을 위로하는 시설이다.



이곳에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자경단원 등에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인 6천여명을 추모하는 비석도 경내 한쪽에 설치돼 있다.
그런데 다양한 전시시설까지 갖춘 이곳 경내를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의구심이 생기게 된다.
1, 2층 전시공간으로 구성된 기념관을 비롯한 모든 시설이 자연재해와 전쟁을 같은 범주로 묶어서 '잊지 말아야 할 역사'라고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도위령당 경내를 아무리 둘러봐도 외형적으로는 똑같은 결과로 나타나는 지진이나 전쟁의 끔찍한 모습만 있을 뿐이다.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에는 이유가 없지만, 전쟁에는 당연히 그 배경과 이유,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주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정이 다른 희생자들의 넋을 한 곳에 봉안한 결과는 잊지 말아야 할 가치에 대한 혼란을 야기한다.
이를 두고 일왕의 이름으로 수행됐던 전쟁의 책임 소재를 제대로 가리지 않고 넘어간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근대 일본 왕실사(史) 전문가로 통하는 이노우에 마코토 닛케이 편집위원에 따르면 지난 150년간 근대 일왕인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히로히토) 헤이세이(平成, 아키히토)) 등 4명 가운데 쇼와 일왕까지는 일본 국민에게 신적(神的)인 존재였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국은 당시의 그 같은 일본 내 사회 분위기를 용인했고, 그 결과 전쟁 책임의 정점에 있던 히로히토 당시 일왕에 대한 면책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전후 헌법에서 신적인 존재에서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지위가 바뀐 일왕으로 향할 수 있는 전쟁 책임 따지기는 사회 곳곳에서 종적을 감추고 전쟁의 상처라는 결과만 남게 됐다는 것이 일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는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에서 가해자로서의 책임 의식을 약화하고 "우리도 피해자"라는 기묘한 인식을 키우는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한일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최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지적을 했다.
한국에는 광복절인 8월 15일의 의미에 대해 그는 "일본은 패전함으로써 전쟁 국가에서 평화 국가로 바뀐 큰 전환의 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인은 전쟁으로 자신들도 고통받았다고 생각할 뿐 식민지였던 한국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의 고통에 대한 생각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일본에서 저명한 변호사인 우치다 마사토시(內田雅敏) 씨는 전쟁을 둘러싼 일본인의 가해자·피해자 인식 논란에 대해 "당연히 가해자"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일본인은 전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쌍방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지만 다른 아시아 민중은 피해자이긴 해도 가해자성이 전혀 없다"면서 "일본인은 피해자 입장에서 전쟁을 비참한 것으로 보면서 가해성에 대한 인식이 옅어진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우파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기존 헌법을 개정해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꿈꾸고 있다.
그는 자위대 명기 등을 골자로 한 개헌을 빛나는 일본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베 총리가 즐겨 쓰는 표현의 하나는 '마주한다'는 뜻인 '무키아우'(向き合う)다.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과도 조건 없이 마주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겠다고 수차례 말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당장 마주해야 할 것은 가해자로서 일본이 써온 근현대사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parks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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