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영국서 온 첩보요원은 어떻게 '아랍의 영웅' 됐나

입력 2017-06-08 19:16   수정 2017-06-09 07:15

아라비아의 로렌스

스콧 앤더슨 지음 / 정태영 옮김 / 글항아리 / 880쪽 / 4만원



[ 서화동 기자 ] 1914년 1월 초 미국 스탠더드오일의 정보원 윌리엄 예일과 루돌프 맥거번은 팔레스타인(지금의 이스라엘)의 코르누브 돌산 아래에서 석유를 발견했다. 오스만 제국의 외진 구석에서 일어난 이 일로 각국에 비상이 걸렸다. 스탠더드오일은 석유시추권 확보를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영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해군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유전 확보는 경제적 관심사를 넘어 정치·외교적 사안으로 부상했고, 6개 글로벌 기업이 각축전을 벌였다.

그만큼 석유는 20세기 초 핫이슈였다. 전 세계에서 석유 및 관련 제품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뿐만 아니라 석유는 주요 군수물자였다. 미국과 유럽의 석유회사들은 어딘가에 존재할 새로운 유전을 선점하기 위해 지구촌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망한 땅이 바로 유럽과 가까운 중근동 지역이었다. 몰락하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제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차지하기 위해 열강들이 다툰 것도 결국 석유 때문이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이 1962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사진)로 유명한 T.E.로렌스(1888~1935)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논픽션이다. 옥스퍼드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20대 초반의 고고학자 로렌스는 영국 첩보요원으로 중동에 발을 들였다. 고고학 발굴 및 탐사를 통해 중동에 정통해서였다. 당시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랍민족운동을 이용했다. 로렌스가 그 중심이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 통일된 아랍 국가를 세우려던 파이살 이븐 후세인을 내세워 아랍 반란을 일으켰다. 1917년 7월엔 홍해 끝부분의 아카바를 장악했고, 이듬해 가을엔 다마스쿠스(현 시리아 수도)를 점령했다.

로렌스는 아랍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됐지만 영국은 그의 희망을 꺾어버렸다. 1차 대전을 치르면서 영국은 3중외교로 관련국들을 혼란케 했다. 후세인-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인들에겐 거짓 독립을 약속했다. 시온주의자들에겐 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내줬다.

결정적인 것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영국은 이라크를 차지하기로 한 것. 진정한 아랍 독립국은 대부분 아라비아 사막의 격오지만 남은 셈이 됐고, 이렇게 그려진 현대 중동의 지도는 지금도 숱한 분쟁을 낳고 있다.

여기까지는 영화의 줄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제분쟁 전문기자이자 소설가인 저자는 로렌스 외에 세 명의 주연급 조연들을 등장시켜 흥미와 박진감을 선사한다. 카이로 주재 독일대사관의 동양문제보좌관이자 학자인 쿠르트 트뤼퍼, 루마니아 출신인 저명한 유대인 농학자이자 열성적인 시온주의자인 아론 아론손, 스탠더드오일의 정보원 윌리엄 예일이다.

트뤼퍼는 영국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며 지하드를 선동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아론손은 팔레스타인 땅을 되찾아 유대인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첩보조직을 운영하며 영국의 힘을 빌리려고 한다. 스탠더드오일은 세계 대전의 비극을 이용해 크게 한몫을 잡으려고 한다.

책은 에필로그를 포함해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저자는 철저한 고증과 방대한 사료, 최근 기밀 해제된 자료까지 동원해 생생하게 그려냈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사용했다고 할까.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각국의 대표선수들을 내세워 이들이 어떻게 싸우고 협력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국가 간의 협상과 결과뿐만 아니라 현장에서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박진감 있게 펼쳐낸다.

로렌스에 대해서는 출생부터 유년기, 옥스퍼드 재학 시절, 전쟁 이후 피폐한 심리 상태와 불행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반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재생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책을 읽다 보면 현대 중동의 지도가 그려지는 과정이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스만이 장악했던 중동의 운명은 영국, 프랑스 등의 선택에 따라 달라졌다. 저자는 전쟁의 참혹함과 허무함을 이렇게 꼬집었다. “충돌을 부른 요인들은 대부분 사소한 것이었지만 평화를 얻기 위해 넘어야 하는 문턱은 훨씬 높아지고 말았다.(중략) 승전국들은 제국이 새로운 황금시대를 맞이했다거나 이전보다 훨씬 풍요로운 나라가 됐다며 그 모든 살육을 정당화하곤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은밀하게 체결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그렇게 잉태된 현대 중동의 문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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