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바윗길을 가다(20) 인수봉 거룡길 / 이무기들이 놀다 간 인수의 등산학교

입력 2014-09-25 16:06  


[김성률 기자] 도선사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도선사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부지런히 걸으면 30분 거리에 불과한데 아스팔트길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클라이머들은 택시나 도선사 버스를 이용한다. 쉬지 않고 올라 매표소 앞 벤치에서 큰 호흡을 쉬고 있다가 산악계의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을 가진 정승권등산학교의 정승권 교장을 만났다.

우리의 첫 만남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1995년 10월로 기억된다. 여의도 LG트윈타워의 옥상에서 지상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대형현수막을 내리는 일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최초로 이루어지는 일이라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대한산악연맹의 소개를 그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다부진 체격에 눈초리가 만만치 않았다. 요구사항을 당당히 말할 줄 알았고 책임감 또한 강한 사나이었다.

행사가 무사히 끝나고서야 그가  1988년 한국에베레스트 로체 원정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으며 그보다 전에는 한밤에 로프도 없이 320미터의 토왕폭을 올라 다시 클라이밍 다운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의 이름을 딴 정승권등산학교가 출범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최근에는 정승권등산학교총동문회에서 1년만에 7대륙 최고봉을 등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날 정 교장은 부인과 함께 김개남장군길을 등반하고 백운대를 오른 다음 인수남면으로 인수에 올라 비박을 하고 내려온다고 했다. 지난번 선인에서 잠깐 만나고는 헤어지고 또다시 짧은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살다보면 언젠가는 함께 자일을 묶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정 교장은 선인봉의 학교길과 인수봉의 창가방가는길을 개척한 바 있다.


이날 오랜만에 하람산악회의 송기승 대장과 등반을 하게 되었다. 송 대장은 5.13급 이상의 클라이머다. 그는 인수에서 가장 어려운 축에 드는 길로 블루마운틴길을 꼽는다. 그의 말에 의하면 블루 마운틴길에 비하면 빌라길은 '아이들 놀이터'라는 것이다. 블루마운틴길은 인수남서면에 있는데 맨 왼쪽으로부터 가로길, 알핀로제스, 에코, 청죽, 블루마운틴, 검악A, 빌라의 순서이다. 블루마운틴의 난이도는 5.12c 정도여서 빌라길(5.12b)보다 한 단계 높을 뿐이지만 빌라길의 첫째 마디가 수월하고 중간에 쉬어갈만한 마디가 있는 반면 한 피치짜리 블루마운틴은 거의 모든 발동작이 5.12급이라는 것. 글쎄 그런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으나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떨어질 수도 없는 고통 또한 경험하고 싶다.

송 대장이 인수 남측면을 함께 오르며 어느 길을 가고 싶으냐고 묻기에 주저없이 거룡길을 택했다. 하늘길과 빌라길 사이에 위치한 거룡길의 최고난이도는 5.11b로 잡는다. 거룡길은 중상급 클라이머들에게 인기 있는 바윗길이다. 인수에만 모두 80여 개가 있다는 바윗길. 송 대장은 그중에서  명품길로 빌라길, 거룡길, 하늘길, 궁형길, 의대길 등을 꼽았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정승권등산학교 출신들의 암벽산악회인 '등반사랑'의 회원들과 함께 등반을 하게 되었다.

거룡길의 첫째 마디는 난이도 5.10a(자유등반 5.12b), 길이 약 35미터의 크랙과 페이스로 이루어진 길이다. 첫출발지점은 난이도가 그리 세지 않은 곳인데 어이없이 미끄러졌다. 선등이라면 발목이 부러질 수 있는 상황이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홀드를 잡고 계속 10여 미터 오르다보면 홀드가 사라지는 지점이 나오는데 이때는 발 하나가 들어갈만한 둥그런 크랙에 발을 집어넣고 과감하게 일서서는 것이 포인트다. 손홀드만 찾다보면 이 지점을 통과하기 힘들다.


둘째 마디는 밴드를 따라 약 20미터를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구간이다. 이 밴드를 용의 비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난이도 5.6. 셋째 마디는 길이 28미터의 슬랩구간이다. 난이도는 5.10b에 이른다. 직상으로 약 7미터 정도 오르다가 왼쪽으로 트래버스한 다음 다시 오르는 구간이다. 선등자가 트래버스할때는 그야말로 가슴이 졸일 것이다. 기자는 슬랩에 약한데다가 말번이어서 펜듈럼으로 고비를 무사히 통과한다.

넷째 마디 역시 거룡길의 크럭스로 꼽히는 곳이다. 거리 38미터, 난이도 5.11a. 바짝 선 슬랩과 크랙으로 이루어져 있고 슬랩을 오르면 이른바 P크랙이 등장하면서 클라이머를 압도한다.
다섯째 마디는 폭이 넓은 슬랩이다. 거리 15미터, 난이도 5.8. 여섯째 마디는 거리 40미터의 짭짤한 슬랩(5.10a)이다. 이곳을 마치면 드디어 고인돌이 기다리고 있는 인수 정상이다. 인수 정상에는 흔히 하는 말로 자판기도 없고, 떡을 파는 아줌마도 없으며, 자장면 배달도 되지 않는다. 저 멀리 백운대를 딛고 선 등산객들이 바라다 보이고 사방으로 거침없는 전경이 펼쳐진다.

거룡길은 1972년 거리회의 장봉완, 김제훈, 전재운 등이 낸 길이다. 거리회는 이 길 외에도 인수 남면에 '잃어버린시간을 찾아서'라는 난이도 5.13a의 한 마디짜리 빡센 바윗길도 냈다. 서울시산악연맹 가맹단체 제1호인 '거리회'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하지만 산악인이라면 장봉완이라는 이름 석자를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장봉완은 ‘한국산악계의 등반대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인물로 17세부터 22세까지 6년간 암벽등반만 천 번을 넘게 했다는 산악인이다. 6년이면 2,190일이니까 단순히 계산하면 이틀에 한 번씩 등반을 한 셈이지만 암벽등반이 어려운 겨울과 비오는 날 등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바위에 붙어있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당시 그와 둘도 없는 파트너였던 전재운은 바윗길을 개척하는 장봉완의 빌레이를 봐주다가 50미터 이상을 추락하는 장봉완을 지키기 위해 끝내 자일을 놓지 않았고 그의 손바닥에 뼈가 보일만큼 큰 상처를 남겼다. 전재운은 1976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뽑혀 설악산에서 훈련을 받다가 눈사태에 묻혀 운명했고 마침 휴가차 나와 있던 장봉완은 전재운을 인수봉이 잘 보이는 족두리봉 아래 능선에 묻었다.

전재운의 몫까지 함께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장봉완은 이후로도 안나푸르나(8091m / 1989년) 동계등반, 코뮤니즘봉(7495m / 1989년) 등정, 시샤팡마(8027m / 1991년)와 초오유(8201m) 등반 등을 해냈고 그가 맡은 원정대에서는 단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았다는 귀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거룡길 개척 시기인 1971년 가을부터 다음해 5월28일까지 이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바윗길을 개척했다. 헬멧은 물론이요 안전벨트도 없었다. 장봉완은 당시의 암벽화인 크레타슈즈도 없어 군용 정글화를 신고 길을 개척했다. 무엇이 그들을 이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게 했을까? 길을 개척하면서 이 길이 40년이 지난 후에도 수많은 산악인들의 사랑을 받는 바윗길로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바위를 사랑한만큼 휴머니즘이 강했던 그들. 거룡길은 히말라야와 알프스를 포함한 전세계의 고산 거봉을 주름잡은 대한민국의 산악인들을 키워낸 인수의 등산학교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비전과 이상만은 용의 기개를 넘을만큼 씩씩하고도 당당했던 1970년대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려낸 자화상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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