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nt영상] K-프로듀서스, 서울시뮤지컬단 유인택 단장

입력 2014-02-28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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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천범주 교수 / 편집 김희운 기자 / 영상 이홍근 PD / 박수민 에디터] 대한민국의 문화, 한류 바람은 1990년대 영화로부터 시작했다. 2000년대 접어들어서는 드라마가 본격적인 한류바람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K-POP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뮤지컬로 사이클이 순연되어지고 있다.

이에 프로듀서 1세대로 국내 영화계의 뉴웨이브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산업화의 최전선에서 대한민국 문화산업을 이끌어왔던 맹장으로, 이제는 한류의 최전선에 서있는 뮤지컬계의 영역확장과 융합을 위해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며 다소 어려운 위치에서 후배들을 이끌어가고 있는 서울시뮤지컬단의 유인택 단장을 만났다. 그의 영화산업으로 얻은 성공적인 노하우를 한국의 뮤지컬산업계에 어떻게 접목을 시킬 수 있는지 알아봤다.

민주화 역동기의 연극쟁이 약대생

Q. 본인에 대한 소개
A. 현재 세종문화회관 내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을 맡고 있고 창작뮤지컬의 기획과 제작 및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Q. 사회초기 제약학과를 전공하고 문화계에 발을 들였는데 동기가?
A. 대학교 2학년 때 아주 우연히 학교동기가 ‘함춘극회’라는 연극반의 반장이었는데 정기공연을 할 배우가 없다고 저한테 도와달라고 했어요. 당시 연극의 ‘연’자도 모르던 저는 친구의 부탁이 계기가 되어 연극배우를 하다가 결국에는 연극에 미치게 되었고 이후에 우리나라 마당극, 탈춤 등 전통예술을 경험하게 되면서 학교공부보다 연극에 빠져들게 되었죠.

Q. 영화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A. 민주화 열풍이 한창이던 80년대에 삼십대 중반이었던 저는 연극생활을 하다 먹고 살기 위해 연극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영화라는 대중문화 장르로 전향해 문화산업가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즉,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문기획자로써의 직업을 선택한 거였죠.

프로듀서 1세대들이 일군 한국영화의 뉴웨이브

Q. 영화사 ‘기획시대’에 대한 간단한 소개
A. ‘모가드코리아’라는 회사에서 ‘우묵배미의 사랑’이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이장호 감독의 판영화사에서 최진실씨의 데뷔작인 ‘숲속의 방’, ‘핸드백속의 이야기’ 등 짧은 기간 동안 연속적으로 한국영화 기획, 제작에 참여하면서 영화를 배우게 됐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국내 영화계의 할리우드 영화 점유율이 90%이상으로 절대적이어서 한국영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경쟁도 안 될 때지만 가난한 젊은 영화인들은 국산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그러다가 당시 신철, 강우석 감독 등 30대 초반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의기투합해서 로맨틱 코미디인 ‘결혼이야기’를 제작해서 흥행에 성공했고 이에 힘입어 ‘미스터 맘마’라는 기획영화를 통해 4억 1천만 원의 수익으로 소위 대박을 치면서 스텝들에게 5천만 원을 보너스로 지급해주고 1/3씩 나누어 줬습니다. 이듬해인 1993년에 신철 대표의 ‘신씨네’, 강우석 감독의 ‘강우석 프로덕션(현 씨네마서비스)’ 그리고 제가 ‘기획시대’를 만들게 됐고 이것이 한국영화의 프로듀서 1세대들의 뉴웨이브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던 거죠.

기획시대의 상업적 감각과 시대적 신념

Q. 기획시대 초기 ‘너에게 나를 보낸다’ 같은 포르노그라피 영화 등을 제작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당시 성공여부는?
A. 영화가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 \는 20억 원 이상의 대박을 거둔 작품인데 아마 현재의 가치로 따지면 천만관객을 돌파한 경우로 100억 원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인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난 후 ‘이 영화에서 번 돈은 한국영화를 위해 쓴다’라는 생각으로 한국영화 제작에 계속해서 열심히 투자를 했습니다.

Q. 기획시대는 감각적인 기획력이 돋보이는 작품도 많지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재수의 난’, ‘화려한 휴가’ 등 사회적인 작품들을 수시로 제작한 이유는?
A. 꼭 목적의식을 갖고 영화를 했던 것은 아니고 작품의 완성도를 중요시 했어요. 한국영화가 당시의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하려면 대중성(상업성)이 중요했기 때문에 소재나 신념을 가리지는 않았는데 제 출신이 마당극 등 민주화 운동 출신이다 보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재수의 난’ 같은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들의 제작의뢰가 자연스레 들어왔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경우에는 국민모금운동으로 제작비가 마련되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클라우드펀딩’인 거죠.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제작투자를 했는데 수익도 있었고 청룡영화제 수상과 베를린영화제도 나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됐죠. 그리고 실제 전태일이란 인물의 잘못된 이미지가 바로 잡히는 것을 보면서 보람과 뿌듯함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한국 영화의 해외 진출기

Q. 90년대 중후반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작품을 제작하면서 한편으론 현상수배와 이방인 등 해외 진출시도가 엿보였는데
A. 그때 당시 젊은 영화인들은 혼자 호의호식하기보다 한국영화의 생존을 어떻게 이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막강한 할리우드 작품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작품을 고민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돌파구를 찾은 것이 해외시장 개척이었고 그 당시 인구 6백만의 홍콩영화 해외수출 성공사례가 모범답안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한국뿐만이 아닌 해외에서도 통할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영어권시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정서와 언어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영어를 쓰는 호주와의 공동제작과 글로벌적으로 통할 수 있는 아이템인 액션과 코미디장르를 혼합해서 박중훈 주연의 ‘현상수배’라는 영화를 만들게 됐지만 역시 영어권 장벽을 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외국문화에 너그러운 유럽시장을 공략하였는데, 마침 당시에 소련의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면서 영화제작 수준이 뛰어난 동유럽시장이 개방되었고 저렴한 인건비와 함께 한국의 자본과 아이디어를 결합해 한국의 유명배우 안성기와 글로벌 아이템인 태권도를 가지고 동유럽 폴란드로 넘어가 ‘이방인’이라는 5:5 합작영화를 만들게 됐습니다.

Q. 기획시대의 해외진출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A. 솔직히 9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기량도 부족하고 인력도 적었는데 특히, 영화 제작시스템이 주먹구구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정해진 시간 없이 하루 꼬박 촬영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해외에서는 정해진 시간 내에 합리적으로 촬영하는 시스템인데 서로 다른 시스템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적용하기가 어려웠던 거죠. 그리고 KOREA라는 브랜드가 지금처럼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라 정작 개척하고 싶은 해외시장에 대해 사전지식도 없이 오로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진출해야만 했는데 그런 점이 어려웠습니다.

차세대 영화인들 양성

Q. 2000년대 들어와서 젊은 프로듀서들을 양성하고 젊은 감독들에게 많은 기회를 준 걸 로 아는데 그렇게 한 배경과 향후 어떤 프로듀서와 감독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나?
A. 한국영화가 안정적인 발전을 하기 위해선 신인영화인들이 많이 나와 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흥행 감독들과 일을 하게 되면 수입은 안정적이고 캐스팅 등도 편하지만 여러 방면의 발전이 적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신인 감독들의 새로운 아이디어로 영화시장이 더 진화할거라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지금의 영화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당시의 감독들로는 ‘감시자들’을 연출한 ‘일단뛰어’의 조의석 감독, ‘해적 디스코 왕 되다’ 김동원 감독, ‘목포는항구다’, ‘화려한 휴가’ 김지훈 감독 등이 있습니다.

영화의 산업화와 벤처캐피탈리스트로의 변신

Q. 영화 투자전문가로써의 활동도 있었는데, 영화에서 뮤지컬 산업으로의 변신을 꾀한 계기는?
A. 2000년 중반이 되자 영화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이에 CJ, 롯데, 쇼박스 등의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에 투자들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영화인으로서 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와 대기업이 선택해서 만들고 싶어 하는 영화는 좀 달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이 50에 벤처캐피탈 리스트 수업을 받고 자격증을 따서 창업투자회사를 직접 설립하게 됐습니다. 당시 저의 경력은 다른 투자전문가들과 달리 영화인에서 시작한 금융인이었기 때문에 감독들을 비롯한 영화인들과의 소통도 잘 이루어졌었고 이에 따라 성공적인 투자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오십대에 찾아온 인생굴절 그리고 뮤지컬과의 만남

Q. 영화에서 뮤지컬 산업으로의 변신을 꾀한 계기는?
A. 계속해서 영화 투자전문가로 활동을 하다가 상대적으로 경영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했던 저는 적대적 기업인수 합병이라는 큰일을 당한 후 결국 제 인생 모두를 쏟아 부어 설립하고 운영했던 회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투자 전문가로서 영화 이외에도 여러 장르에 투자를 하던 중 뮤지컬 분야에도 투자를 하면서 자연스레 뮤지컬에 대한 인연도 시작됐고 그때 투자한 작품 중 하나가 창작뮤지컬 ‘구름빵’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름빵’이 뮤지컬계에 알려지게 되면서 저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영화투자회사를 잃어버린 저한테 뮤지컬 시장에서 러브콜이 들어오면서 이 산업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주먹구구 뮤지컬에 영화제작시스템을 도입

Q. 창작뮤지컬인 ‘구름빵’이 여느 뮤지컬과는 다르게 서울에서가 아닌 부산에서 만들어 졌는데 어떠한 배경이 있었는지?
A. 영화는 촬영하기 전에 콘티와 스토리보드를 통해 제작 후를 사전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데 뮤지컬은 시나리오 이후에 다른 장치가 없이 오로지 연출가의 능력으로만 작업이 이루어지거나 공연 전 리허설을 봐야만 공연의 상황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의 창작뮤지컬은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질적 수준이나 재미에 대하여 외면을 받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투자자 입장이었던 저는 이런 상황이 못미더워 영화시스템을 이용해 공연제작 전에 콘티와 스토리보드를 사용해 제작하고 본 공연 전 리딩 프리젠테이션 또는 쇼케이스를 열어 직접반응을 확인하는 시스템을 적용시켰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이미 정착되어있는 시스템이었고 그 예상은 적중해 창작 뮤지컬 ‘구름빵’은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성공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을 갖추는데 몇 가지 문제도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쇼케이스라고 하더라도 배우들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출연료 등 예산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부산의 동서대학교 뮤지컬학과와 결연해 학생들에게는 실전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본 공연을 할 때도 우수학생들은 직접 출연하는 기회를 주어서 산학협력에 좋은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 창작뮤지컬 ‘구름빵’은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전국 누적관객 5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가 뮤지컬시장에서 소문이 나면서 뮤지컬 제작자로 변신한 가수 유열씨가 ‘브레맨음악대’라는 뮤지컬에 벤치마킹을 하였고 지금은 뮤지컬계에서는 공식 시스템으로 활용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Q. 이후 뮤지컬 ‘광화문 연가’와 ‘화려한 휴가’에 대해
A. 당시 영화 흥행에 힘입어 ‘미녀는 괴로워’가 소위 무비컬이란 장르의 뮤지컬로 제작이 됐는데 730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 ‘화려한 휴가’도 무비컬로 광주의 송원대학교와 산학협력을 맺어 뮤지컬학과 친구들과 같이 쇼케이스를 열고 검증 받으며 제작됐습니다. 이에 매년 5월에 광주에서 본 공연을 하고 서울과 일본에서도 초청을 받으며 성공하게 됐습니다. ‘광화문연가’는 청강문화산업대학 뮤지컬스쿨에서 산학협력 교수로 초청을 받고 학교의 브랜드홍보 차 메이저 창작뮤지컬을 활용한 예로 이 역시 학생들이 실전을 통해 졸업 후에도 꾸준히 연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고 학교의 가치를 높이며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앞서가는 프로듀서의 선구안

Q. 어떠한 작품들이 성공할지 보이는지?
A. 사람마다 판단하는 기준이 다른데 저 같은 경우는 작품의 아이템으로 판단합니다. ‘구름빵’같은 경우엔 거의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제가 어린이의 눈높이를 맞추기에 애를 먹었는데 어린이 콘텐츠들을 보면 신데렐라, 피터팬, 오즈의 마법사, 피노키오 등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진 외국의 판타지 작품들이 1년 내내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름빵’의 경우는 투정부리는 아이들이 오히려 곤경에 처한 아빠를 도와주며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는 생활밀착형 소재가 아이템 상으로 차별적이었고 그게 성공의 요소가 된 것 같습니다.

* 유인택 단장은 서울대학교 제약학과(1975~)를 전공하고 연우무대 사무국장으로 문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민중문화운동협회,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문화 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다 1989년 모가드코리아에 입사, 판영화사와 신씨네를 거쳐 1993년 기획시대를 설립했다. 이후 이춘연이 이끌던 성연엔터테인먼트와 기획시대를 합쳐 씨네2000으로 통합 출범했다가 다시 1997년 기획시대로 독립한다. 신철의 신씨네, 영화세상의 안동규 대표 등과 함께 한국영화의 산업화를 이끈 영화프로듀서 1세대로 평가 받는다.

1990년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으로 영화산업계에 데뷔 후 1994년 ‘가벼운 포르노그래피’를 표방하며 흥행에 성공했던 장정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라는 작품의 제작과 배급을 겸한 기획시대는 일약 충무로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이후 기획시대는 도전적인 작품들을 꾸준히 내놓았는데, 국민적인 모금 운동을 통해 제작비를 조달한 박광수 감독의〈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은 베를린국제영화제 본선 경쟁 부문 진출을 포함해 국내외 영화상을 휩쓸며 기획시대의 감각적인 기획력을 보여 줬다.

유인택대표의 기획시대는 이후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1996>과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의 난-1999> 등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들을 제작하는 한편 영어권 시장을 겨냥한<현상수배-1997), 유럽 시장을 염두에 둔 〈이방인-1998> 등 해외 로케이션과 해외 합작 영화를 제작했다. 기획시대는〈이재수의 난〉이 가져온 막대한 실패로 표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여균동 감독의〈미인-2000>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2001년 2월, 기획시대는 유상 증자를 통해 자본을 유치하며 새 출발한다.

영화사로는 보기 드물게 사외 이사제도를 도입하고 전문 경영인을 영입했으며 젊은 프로듀서를 전면에 내세워 영화를 기획하게 하고 유인택 자신은 한발 물러났다. 이후 기획시대는 기성 감독의 문제작을 지원하는 모험대신 신인 감독의 젊은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데 역점을 뒀다. 조의석 감독의〈일단 뛰어-2002>, 김동원 감독의〈해적, 디스코왕 되다-2002>, 봉만대 감독의〈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 김지훈 감독의〈목포는 항구다-2004>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유인택대표는 관객 수 730만의 흥행성과를 올린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2007>를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기획시대를 물려주며, 영화제작에서 로맨틱아일랜드(2008), 순정만화(2008), 7급 공무원(2009), 달빛 길어올리기(2010)의 투자와 고문으로 한 발짝 물러서며 문화콘텐츠 투자전문가로서도 성공하지만 금융권의 적대적 기업인수합병을 당해 아쉽게도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후 뮤지컬에 영화의 선진제작시스템 도입 등을 발판으로 뮤지컬계에 재기의 발판을 만들며 현재는 서울시뮤지컬단을 이끌어가는 한편 대학에서 석좌교수로 학생들에게 그간의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현 한국뮤지컬협회 이사, 서울영상진흥위원회 위원,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사
뮤지컬 <구름빵> <광화문연가> <화려한휴가>

서울시뮤지컬단장으로 뮤지컬산업 도전!

서울시뮤지컬단의 역할

Q. 서울시뮤지컬단에 대한 소개?
A. 세종문화회관 소속 9개의 예술단의 하나로써 국내 최초의 뮤지컬단으로 외국의 전통 뮤지컬과 한국적인 작품을 두루 공연하고 있으며, 예그린악단이 그 모태로서 1961년 10월 서울시가무단으로 창단됐다. 근래 활동사항으로는 1998년에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오영진 원작 「한네의 승천」을 뮤지컬화한 「한네」(한 많은 여인네의 준말)로 작품상(대상), 연출상, 미술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으며 1999년에는「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공연하였고 2000년「포기와 베스」, 2001년「한여름밤의 꿈·신라의 달밤」, 2002년「성춘향」 2003년 「아가씨와 건달들」, 2004년 「한여름밤의 꿈」, 2005년 「헤라클레스」, 2006년 「어린 왕자」, 2007년 「달려라 하니」, 2008년 「소나기」를 공연했다.

Q. 서울시뮤지컬단에 부임하고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A. 서울시뮤지컬단은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고 민간뮤지컬과는 다르게 제작비의 투자규모가 많이 적다보니 상업적인 경쟁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을 기울이는 분야는 창작뮤지컬입니다. 경제가 발전 할수록 뮤지컬의 수요는 더욱 커지겠지만 민간에서는 위험이 있는 창작뮤지컬은 꺼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손해에 관대한 서울뮤지컬단이 창작뮤지컬의 활성화에 기여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2년 동안 창작뮤지컬 3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온 첫 작품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학교성폭력에 대해 알리는 뮤지컬 ‘호기심’이라는 작품으로 순회공연을 했고 그 다음으로는 휴먼뮤지컬 ‘밥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이라는 뮤지컬을 만들었습니다.

창작뮤지컬 활성화를 위한 서울시뮤지컬단의 성과와 지향점

Q. 제작비 50억 원의 민.관(상업과 공공)합작뮤지컬 ‘디셈버’의 공동 기획 및 제작, 현재시점의 성과와 대한민국 창작뮤지컬 시장에 주는 의미는?
뮤지컬은 영화와는 달리 대극장용 수입뮤지컬이 뮤지컬시장의 주류를 이룹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작뮤지컬도 대극장용으로 활성화돼야 하는데 손해를 걱정하는 민간부문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극장들 또한 창작뮤지컬은 오픈취소 등의 걱정을 이유로 대관을 안 해 주려고 하죠. 그래서 영화 스크린쿼터제처럼 창작뮤지컬의 극장대관쿼터제를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디셈버’ 같은 큰 규모의 창작뮤지컬이 활성화 돼야 제작이나 창작 역량도 커지고 관객입장에서는 외국과 마찬가지로 큰 규모의 공연을 볼 수 있는 문화여건도 충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대표 창작뮤지컬 ‘디셈버’나 ‘광화문연가’같은 창작뮤지컬들이 외국의 뮤지컬 ‘캣츠’나 ‘미스사이공’처럼 회를 거듭해 갈수록 자리를 잡아야 하고 이러한 면에서 저희 서울뮤지컬단이 일조를 했다는 것에 의미도 있고 보람을 느낍니다.

Q. 서울시뮤지컬단의 창작 공모사업 ‘힘내라 우리 뮤지컬’이란?
A. 창작뮤지컬을 하고 싶어 하는 민간들은 많지만 그런 기회를 만들기가 열악해 공공기관으로서 저희 시립뮤지컬단이 기회를 주고자 최소의 예산과 가지고 있는 극장을 이용해 상업화되기 전까지의 쇼케이스를 치루고 그것을 본 투자자들이 픽업을 할 수 있게끔 만든 사업이 ‘힘내라 뮤지컬’이란 사업입니다. 그중에 힙합을 채용한 댄스뮤지컬 ‘문 나이트’라는 작품이 선정되어 12억원의 투자자를 만나 2014년 2월에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Q. 서울시뮤지컬단의 최근 작품과 준비 중인 작품은?
A. 장영실과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다룬 ‘세종과 영실’이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세종대왕과 장영실이란 인물에 대하여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하였는지 그리고 인간적인 우정에 대해 학생들이 맘 편히 볼 수 있게 교육적인 측면과 함께 재미를 불어넣어 주고자 기획 중에 있습니다.

Q. 뮤지컬 산업계에서 서울시뮤지컬단의 역할과 지향점은?
A. 공공기관으로서 공공성을 최우선시하고 있죠. 아직까지는 뮤지컬이 고가의 문화상품이라 할 수 있는데 적은 돈으로도 많은 국민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뮤지컬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뮤지컬단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프로듀서 대한민국 뮤지컬 산업을 말한다.

창작(국산)뮤지컬의 현황과 육성

Q. 2001년 <오페라의 유령>이 국내에 소개된 이후 <맘마미아><지킬앤하이드>와 같은 라 이선스 뮤지컬들이 국내 뮤지컬시장의 성장을 주도, 현재에도 그런 양상이 뚜렷한데 앞으로 라이선스뮤지컬과 창작뮤지컬의 관계와 시장점유율을 예측해본다면?
A. 5년 내에 수입뮤지컬과 국내뮤지컬 점유율이 5:5정도가 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그 이유는 유명 수입뮤지컬은 볼 사람들은 이미 보아서 식상하고 새로 들어오는 뮤지컬들은 그저 그런 비슷한 소재와 구성 등 우리나라의 관객들에게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Q. 한때 영화계에서도 논란이 되어온 스타에 대한 의존도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
A. 처음 시장을 개척하는 데에는 한류스타가 필요했습니다. 이번 ‘디셈버’라는 뮤지컬에서도 김준수라는 한류스타가 있었기에 초기 성공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뮤지컬도 한국영화처럼 탄탄한 스토리와 재미와 감동을 주는 웰메이드 뮤지컬로 승부를 거는 것이 뮤지컬의 발전과 수익적 개선에서도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Q. 뮤지컬산업의 성장과정을 보면 영화산업과 유사한 점이 많이 보이는데
A. 영화는 만들어놓고 배급이 안정해져도 재미만 있다면 극장에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공연은 대관이 안 되면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대관이 안 된 공연에는 스텝이나 투자자들이 계약을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국내는 공공극장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런 국공립극장에 한해 창작뮤지컬 대관쿼터제의 필요성이 있고, 10여 년 전에 한국영화계가 도약할 시점에 정부에서 1,750억이라는 지원금을 영화계에 과감하게 지원한 것처럼 뮤지컬에도 자금지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Q. 당시 영화산업은 배우, 제작자, 프로듀서들이 풍성했지만 뮤지컬은 취약한 것 같다. 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A. 간단하게 말하면 돈이 모이면 사람이 모입니다. 한국영화도 2000년대 초 ‘쉬리’, ‘친구’, ‘JSA공동경비구역’ 등 소위 대박 영화가 나오자 젊은 인력들과 자금이 모이면서 한국영화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연극과 뮤지컬은 아직도 가난하다는 개념이 바탕을 이루고 있고 그 와중에 돈 이야기를 꺼내면 멀리하는 성향이 있는데, 이런 개념을 바꾸고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모델을 제시해야 자금도 유입되고 소비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시장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Q. 일본의 뮤지컬시장은 약 1조원, 우리나라의 뮤지컬 시장은 3,000억 원인데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는가?
A. 국민소득의 향상과 국가경제가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생활의 일상화가 되어서 경기에 민감하지 않지만 공연은 시장경제와 민감하게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도 문화산업에 더욱더 힘을 쓰고 있고 소비자들도 그에 맞춰 뮤지컬에 더욱더 관심을 주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발전해 나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뮤지컬의 창작기회와 상업예술에 대한 인정

Q. 한국 뮤지컬계의 성장과 발전에 발목을 잡는 문제점이 있다면, 그리고 그 해결책은?
A. 현재 뮤지컬시장이 3000억 원 정도지만 사실 대부분이 라이선스 뮤지컬 즉, 이미 만들어져 넘어온 공연들입니다. 그에 반해 한국영화는 태생적으로 백지에서 시작해서 창작을 통해 발전했는데 현재의 뮤지컬은 이미 성공한 공연들을 그대로 복사해온 것 들이고 결국 대부분의 뮤지컬인들은 창작 경험이 부족한 셈이죠. 그렇기 때문에 ‘힘내라 뮤지컬’ 프로젝트처럼 창작뮤지컬에 대한 기회가 많이 부여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비즈니스 마인드로 접근해 볼 때 대부분의 뮤지컬 인력들이 연극을 하다가 뮤지컬로 옮기신 분들이 많은데 연극은 태생적으로 순수예술이고 뮤지컬은 태생적으로 대중예술입니다. 고급 오페라에서 서민들의 문화향유에 맞춰 태어난 게 뮤지컬이기 때문에 뮤지컬을 대할 때에는 순수예술성 보다는 완성도가 높은 대중적인 작품인지, 수익성이 있는지에 대한 평가로 눈높이를 맞춰 작업해야 되며 이런 생각들이 산업 전반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K-MUSICAL! 대한민국 뮤지컬 해외로~

Q. 한국창작뮤지컬의 해외 진출사례?
A. ‘광화문 연가’는 중국과 일본에 공연을 갔다가 다시 준비 중이고 ‘김종욱 찾기’는 중국버전으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빨래’ 라는 소극장 뮤지컬 역시 일본에서 리메이크 공연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Q. 국내 창작뮤지컬의 해외시장 경쟁력은 무엇이며, 시장 확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A. 중국과 일본의 뮤지컬도 대부분 서양뮤지컬 라이선스를 들여와 공연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드라마트루그나 노래와 춤이 탁월한데 지금 일본에서 맹활약중인 뮤지컬 배우들이 우리 동포 2,3,4세들로 이루어져 있고, 굳이 한류스타가 아니어도 홍광호 등 우리나라 뮤지컬 배우들이 일본에서 활동을 하면서 여러 팬 층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탄탄한 스토리와 연기 및 노래, 춤 실력으로 준비하고 해외 특히 아시아 시장을 노린다면 충분히 성공 가능하리라 보고 있습니다.

Q. 한류는 영화로부터 드라마, K-POP으로 이제 뮤지컬에 대한 기대를 해 본다. 해외 진출에 대한 전망과 이상적인 방식은?
A. 아직은 초기단계라 확실한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중국을 예로 들면 공동제작을 하거나 뮤지컬 시스템을 수출 및 뮤지컬 라이선스를 파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Q. 끝으로 영화프로듀서로써 또는 뮤지컬 프로듀서로써 한국을 대표할 후배 기획자들에게 한 마디
A.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저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위 안정된 직업분야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이 분야에서 성공 하려면 정규직과 같은 안정은 쥐약이라 생각합니다. 그 대신 불확실한 성공이라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배수의 진’을 치고 죽기 살기로 준비하고 일을 한다면 기회는 반드시 여러 번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회가 누구에게는 빨리 올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늦게 올 수도 있지만 결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과 그 기회가 오면 잡을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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