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馬車이야기⑪]슈투트가르트 정신 담은 포르쉐(Porsche)

입력 2015-12-18 08:40  


 흔히 엠블렘으로 말(馬)을 사용하는 자동차회사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으로 스포츠카 전문업체인 '포르쉐(Porsche)'와 '페라리(Ferrari)'가 있다. 그 중에서도 독일의 대표 고급 스포츠카 포르쉐는 193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기술자였던 공학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셰에 의해 설립됐다. 주로 고급 스포츠카를 만들며, SUV와 고급 세단 시장에도 진출했다.

 그런데 포르쉐는 폭스바겐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가 폭스바겐 비틀을 설계했고, 포르셰 박사의 외손자이자 페르디난트의 딸 루이제 포르셰의 아들인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폭스바겐그룹의 감독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매출 증진을 바탕으로 2008년에 폭스바겐을 자회사로 인수하려 했으나 그 해 미국발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 금융 경색에 따른 자금압박으로 지난 2012년 7월5일 폭스바겐 지붕 아래로 들어갔다. 
 




 포르쉐의 대표 자동차는 911 시리즈와 박스터, 카이멘, 카이앤, 마칸, 파나메라 등이다. 폭스바겐 비틀을 기반으로 만든 스포츠카 '356'에 붙은 별명인 "점프하는 개구리"를 시작으로, 역사가 오래된 911의 둥근 헤드램프 덕분에 포르쉐에서 나오는 차들은 "개구리"라는 별칭이 있다. 하지만 포르쉐는 뛰어난 주행능력과 함께 우수한 내구성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쉬지 않고 한번에 '천리(392km)'를 달린다는 '천리마'를 연상시킨다. 검은 말(흑마)을 중앙에 놓고 사선으로 잎사귀를 배치한 포르쉐 엠블럼은 본사가 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市의 문장에서 비롯됐다.

 슈투트가르트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 흔적은 1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네카어 강 주변의 로마군 요새가 바로 그것이다. 수 백년간 요새는 원형 그대로 잘 유지됐지만 30년 전쟁, 루이 14세의 침입, 1차와 2차 세계대전 등을 겪으면서 아쉽게도 지금은 옛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슈투트가르트가 역사의 현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시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1세의 아들이었던 슈바벤 대공 루돌프가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다. 특히 말 사육으로 유명했는데, '슈투트가르트'라는 이름은 고대 독일어로 '말을 기르는 마을'을 의미하는 '슈투오텐가르텐(stuotengarten)'에서 유래됐다. 먹이가 상당히 풍부한 덕분에 기병대를 양성하기 위한 목장이 있었는데, 한 마디로 독일 국영 목장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독일 못지 않게 한국도 양마(良馬)와 생산관리를 위해 마정과 목장 조직을 독창적으로 갖추었던 민족 중 하나다. 초기 국가부터 마정과 목장이 설치돼 경장기마전(經裝騎馬戰)이 행해지고, 삼국시대에는 중장(重裝) 기병전이 보급됐다. 전투 형태가 중장기병전으로 변한 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가장 눈에 띄는 나라는 단연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국초부터 목장을 설치한 뒤 양마 생산에 힘썼는데, 22년(대무신왕 5년)에는 사기 대완열전(大宛列傳)에 전하는 신마(神馬)의 존재를 찾을 수 있어 당시 외래 우량마를 목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고구려의 기병출전 횟수는 12회이며, 5천기(騎)이상 출전도 5차례나 될 정도로 활발하게 기병을 운용했다.






 이후 고려시대는 북방민족과 투쟁으로 마정조직이 잘 정비된 시기다. 중앙 병부 밑에 마정실무를 맡은 사복사(司僕寺), 전목사(典牧司)를 두고 지방은 목감(牧監)을 배치해 각 목장에 노자(奴子) 및 간수군(看守軍)을 관할하도록 했다. 이처럼 체계적인 목장 시스템으로 양질의 군마를 공급할 수 있었고, 거란과 여진을 격퇴하고 몽고에 30여년간 항쟁할 수 있었던 근간이 됐다. 즉 말이 있었기에 나라를 지키고 영토와 민족을 보전한 것이다. 세계에서 3일을 버틴 나라가 없었다는 몽고전에서도 고려는 장장 30년간이나 투쟁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군마(軍馬)의 품종을 보존하고 양성하기 위해 국영목장 제도를 시행했다. 전국에 60~100개 정도의 목장을 설치하고, 2만~4만 마리의 말을 사육했다. 전문 사육사와 수의사, 목동도 양성했다. 서울에 설치한 목장이 지금의 성동구 행당동 살곶이 다리 일대인 살곶이 목장이었다. 이곳은 왕실의 전용 목장으로 오랫동안 보존됐다. 지방 목장은 주로 섬이나 해변의 곶에 위치했다. 이런 곳에 둔 이유는 농민들이 경작하지 않는 땅인 데다 무엇보가 맹수나 도적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이다. 목장이 가장 많은 곳은 섬이 많은 전라도였지만 최대 목장은 단연 제주도였다. 조선시대 목장 말의 절반이 제주도에서 사육됐을 정도다. 






 제주도가 한때 몽고에게 말 생산지로 지배당한 수치스런 역사도 있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지나친 징마(徵馬)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말을 집중적으로 생산한 제주도가 있었기에 외교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또 한 달만에 수도 한양까지 침략당한 임진왜란도 때맞춰 말을 공급한 덕에 권율 장군을 비롯한 각처의 장수들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험난한 바다에서 멀미로 쓰러져 표류하거나 태풍을 만나 익사하는 말을 섬에서 육지로 안전하게 실어 나르기 위한 공마선(貢馬船)도 발명할 수 있었다. 공마선은 3~40필의 말을 지그재그로 꽉 끼도록 세워 싣고 해풍을 이용해 제주도에서 해남이나 강진까지 하루나 이틀 내에 육지로 옮겼던 배였다. 전체 말의 7~80%를 제주도에서 보냈으니 이런 난세가 조선술과 항해술을 발달시킨 게 아닐까.

 무릇 차명(車名)은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한다. 슈투트가르트의 문장을 자동차 브랜드 엠블렘으로 사용하는 포르쉐 역시 단순히 문장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슈투트가르트의 역사와 정신을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니 포르쉐를 상징하는 말(馬)은 그저 포르쉐의 것이 아니라 슈투트가르트의 것으로 봐도 될 듯하다.

 송종훈(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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