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현대의 DNA가 태동한 순간"…역사의 흐름 바뀐 1947년

입력 2019-10-03 17:55   수정 2019-10-04 00:31

1947년은 한반도의 분단과 비극적 전쟁을 불러온 주요 사건이 발생한 격동의 한 해였다. 그해 3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자유와 독립 유지에 노력한 반공국가에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2월 한반도 북녘에선 정부 역할을 하는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수립된다. 9월 유엔 총회에는 한국 문제가 정식으로 상정됐다. 9월 말 소련이 한반도에서 미·소 양국군 동시 철수를 제의하지만 결렬되고 10월 한반도 문제를 논의해온 미·소 공동위원회는 무기한 휴회에 들어간다.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1947년 파리조약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대한 관심이 시들고 좌우 이념에 따른 냉전의 열기가 본격적으로 타오른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창설됐고, 이스라엘 건국을 앞두고 유엔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열을 올린다. 소비에트 연방은 갑자기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서유럽 부흥을 위한 미국의 마셜플랜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해도 1947년이다.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을 현대의 기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은 몇 년간 진동했다. 스웨덴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는 저서 <1947 현재의 탄생>에서 “오늘날 세계의 DNA가 태동한 순간이 바로 1947년이었다”며 “이 결정적인 한 해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지배할 힘들이 처음 등장했다”고 말한다. 1947년에 역사의 흐름이 바뀌고 현대사회가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1947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 갈등과 사건을 월별로 정리해 마치 그림 그리듯 보여준다. 인도와 파키스탄 분할지역에선 살육과 강간이 난무한다. 페르 엥달을 비롯한 나치 잔존세력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남미에서 새로이 규합해 파시즘 부활을 도모한다. 크리스찬 디올이 파리에서 여성성을 극도로 강조한 ‘뉴룩(New Look)’을 선보이고,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84>를 탈고한다. 저자는 파국과 탄생이 교차하는 역사적 순간의 빛과 그림자를 마치 현재처럼 생생하고 섬세하게 포착해 문학적 언어로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1947년 한 해를 함께 지나온 것 같은 동시대성을 보여주면서 전후 시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하지만 자유 진영의 미국과 공산 진영의 소련이 이념을 무기로 처음 맞붙은 대리전이었던 6·25전쟁을 촉발시킨 그해의 한반도 역사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6·25전쟁이 단순히 한반도에만 국한된 지역전이 아니라 이념 간 전쟁이자 22개국 195만 명의 유엔군이 참가한 세계사적 전쟁으로 오늘의 세계를 만든 주요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저자의 태생적·환경적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이 책은 세계사를 유럽 및 서방 중심으로 바라봤다는 인상을 준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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