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성 촬영감독 "60년 영화촬영…앞으로도 새로운 길 개척하고파"

입력 2019-10-04 17:24   수정 2019-10-05 00:34

지난 3일 개막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정일성 촬영감독(90·사진)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촬영감독이 회고전의 주인공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정 촬영감독은 1957년 영화계에 데뷔해 60여 년간 거장 감독들과 작업하면서 파격적인 색채와 앵글로 한국 영화의 미학을 격상시킨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회고전에서는 ‘화녀’(1971, 감독 김기영) ‘사람의 아들’(1980, 유현목) ‘최후의 증인’(1980, 이두용) ‘만다라’(1981, 임권택) ‘만추’(1981, 김수용) ‘황진이’(1986, 배창호) ‘본투킬’(1996, 장현수) 등이 상영된다. 4일 부산 해운대 신세계백화점 문화홀에서 정 촬영감독을 만나 소감을 들었다.

“지금까지 138편을 촬영했는데, 사실 40~50편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영화죠. 하지만 그 영화들이 교과서처럼 저를 지배했어요. 실패한 영화가 제게는 반면교사였습니다.”

한국 영화의 격동기를 보낸 그가 남들보다 오랫동안 작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원칙주의자예요. 형식을 중시합니다. 나름대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추구했어요. 그 상위 개념에 ‘영화의 격조’를 뒀죠. 영화의 격조는 촬영감독이 만드는 거예요. 촬영감독 역할이 무엇인지 항상 숙제처럼 생각했습니다. ”

그가 촬영에서 추구한 리얼리즘은 있는 그대로만 찍는 게 아니라 화면에 꿈을 심으려 한 것이라고 했다. “긴장감이 연속되고, 사실주의가 지속되면 지루해집니다. 굉장한 스피드를 요구하는 신 앞에는 슬로 신이 필요합니다. 가령 고 김기영 감독은 공포영화에 유머러스한 장면을 넣어 공포감을 배가시켰습니다.”

그는 스크린 속에서 한국인의 감정을 감동적으로 찍으려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제 영화를 아름답다고 얘기하지만, 저는 아름답게 찍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아픔을 어떤 광선과 앵글로 극대화할지에 초점을 뒀죠. 요즘 흥행작들을 보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적이 없다는 거예요. 미국 영화 아류 같은 작품을 찍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남의 영화를 일부러 보지 않았어요. 내가 감동받는 장면이 있으면 모방하려 했을 것이고, 그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그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한 일에 대체로 만족합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감독들과 길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습니다.”

부산=유재혁 대중문화 전문기자 yoo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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