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갇힌 '규제 샌드박스'

입력 2019-11-28 17:32   수정 2020-10-25 19:08


새로운 제품·서비스에 대해 일정 기간 규제를 면제·유예해주는 ‘규제 샌드박스’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까다로운 조건부 승인을 내주면서 새로운 규제를 덧붙이고 있어서다. 담당 부처의 소극적인 태도와 ‘깜깜이’ 심의 과정에 대한 기업들의 불만도 크다. ‘혁신 산업·서비스 육성’이라는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28일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지난 1월 17일 시행된 규제 샌드박스 승인 건수가 180건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대다수는 까다로운 제약 요건을 붙인 조건부 승인이어서 사업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게 관련 기업들의 하소연이다. 택시 동승 중개 플랫폼 반반택시가 대표적이다. 반반택시는 지난 2월 서비스 지역을 서울과 경기 전역으로 신청했지만, 서울 6개 권역만 허용됐다. 서비스 시간도 오후 10시부터 오전 4시까지로 한정됐다. 내국인 공유 숙박엔 ‘집주인 실거주’ 조건이 붙었다. 영업도 1년에 최장 180일만 가능하다. “단기간 수익을 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규제 샌드박스를 통과했지만 또 다른 규제의 벽에 막힌 사례도 있다. 유전자 진단업체 마크로젠은 유전자 검사 항목을 현행 혈당, 탈모, 노화 등 12개에서 고혈압, 위암 등 25개로 확대해달라고 요청했다. 샌드박스 승인은 받았지만 까다롭기로 유명한 기관생명연구윤리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마크로젠은 지금까지 네 차례 심의를 신청했지만 한 건도 통과하지 못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규제를 풀기 위해 도입한 규제 샌드박스가 새로운 규제를 양산하는 ‘규제 박스’로 전락할 위기”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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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껏 뛰놀라더니…'샌드박스'에서도 동네영업만 가능한 '반반택시'

“폭탄을 작은 실험실에서 일단 터뜨려보란 것입니다.”(경제단체 고위관계자)

지난 1월 규제 샌드박스가 시행될 때만 해도 기업들의 기대는 컸다. ‘혁신사업의 물꼬를 틀 것’이란 장밋빛 전망도 나왔다. 시행한 지 300여 일이 지난 지금 ‘규제 혁신의 대표 사례’라고 치켜세우는 정부와 달리 현장의 시선은 싸늘하다. ‘은행 알뜰폰’(은행에 휴대폰 판매 허용) 등 일부 성공 사례도 있지만 대다수 승인 건에 대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다. 까다로운 ‘조건부 승인’ 요건, 규제 실무 부처의 변치 않는 규제 의지, 쟁점 사안에 대한 소극적 심사 등이 규제 샌드박스의 실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조건부 승인’ 남발

모든 규제가 나쁜 것은 아니다. 국민 건강을 위협하거나 개인정보 활용 등이 예상되는 사업과 관련해선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문제는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반영해 까다로운 요건을 제시하는 ‘조건부 승인’이 남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건부 승인으로 사업성이 크게 떨어진 사례는 반반택시뿐 아니다. 공유주방 업체 위쿡은 7월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받았다. 편의점, 대형마트 등에 납품이 가능한 B2B(기업 간 거래) 공유주방이 허용된 첫 사례였다. 하지만 4개월 만에 난관에 봉착했다. 공유주방 음식의 B2B 유통을 서울에만 허용해서다. 공유주방은 ‘전국 단위’ 유통을 원하는 대형마트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해 판로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달 27일 규제 샌드박스로 승인된 ‘내국인 공유 숙박’에도 추가 규제가 달렸다. 내국인을 받으려면 집주인이 반드시 실거주해야 한다. 서울지하철 1∼9호선 역 반경 1㎞ 이내에 집이 있어야 한다. 주택 형태는 단독주택, 다가구주택, 아파트 등 최대 4000곳으로 한정됐다. 영업도 1년에 최장 180일만 가능하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수익을 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여전한 공무원의 규제 권한

공무원의 ‘규제 본능’도 규제 샌드박스를 무력화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접수는 산업통상자원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중소벤처기업부·금융위원회 등 4개 부처가 받지만 심의할 땐 해당 사안에 규제 권한이 있는 실무 부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 심의 과정에서 규제 부처 공무원들이 어깃장을 놓기 일쑤라는 게 경제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농어촌 빈집 숙박공유 서비스를 추진했지만 사업을 못 하고 있는 ‘다자요’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장애물은 ‘농어촌정비법’에 있었다. 법 조항은 ‘농어촌 거주자’만 민박업을 등록할 수 있도록 했다. 다자요 측이 규제 특례를 요청했지만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는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동식 동물 장례 서비스를 준비 중인 브이아이펫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현재 동물 장례는 ‘공원’(동물보호법)에서만 가능하다. 브이아이펫이 4월 규제 샌드박스 특례를 요청하자 심의위원회는 ‘우선 지방자치단체와 업무협약을 맺고 다시 신청하라’는 권고안을 냈다. 며칠 뒤 농식품부는 ‘무허가 반려동물 영업자 특별단속’에 나섰다. 업계에선 ‘새로운 사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쟁점 사안에 대해선 ‘천수답 심의’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얽힌 ‘쟁점 사안’을 두고 정부가 이익단체와 협회의 눈치를 보느라 결정을 유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빈 택시를 이용해 작은 물건을 배송하는 서비스를 추진 중인 딜리버리T는 2월 과기정통부에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답을 받지 못했다. 업계 관계자는 “국토교통부가 딜리버리T 측에 화물연대 등과 협의를 하고 ‘긍정적인 의견’을 받아오라고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들이 쟁점 사안에 대해선 책임을 피하려고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원격 의료 등 민감한 사안과 관련해선 규제 샌드박스 신청을 하지 않고 사업을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규제 샌드박스

특정 지역에서 규제를 면제하는 규제 프리존과 달리 새로운 산업 분야의 제품·서비스에 대해 기존 규제를 일정기간 면제·유예해주는 제도. 안전하고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모래 놀이터처럼 기업이 규제 없는 경영 환경에서 혁신사업을 해보라는 취지로 도입됐다.

황정수/정인설/고재연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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