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없는리뷰] 90년대로 돌아간 ‘백두산’

입력 2019-12-28 08:00  


|상호텍스트성에 물든 ‘백두산’…과거 오락물의 재림
|흥행 공식 따랐지만 돌아온 평은 ‘눈높이를 낮춰라’

[김영재 기자] 백두산이 폭발했다. 이에 남측 특전사 조인창(하정우)은 북측 요원 리준평(이병헌)을 만나 최종 폭발 저지에 사력을 다한다. 그러나 이내 흑심을 드러내는 준평. 과연 인창은 준평을 설득하고 한반도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서두는 작가 스티븐 킹이다. 20일 그는 트위터에 가수 밥 딜런 자작곡 ‘토킹 뉴욕(Talkin’ New York)’ 일부를 인용했다. “사람들은 그 많은 포크와 나이프로 무언가를 잘라야 하지.” 영화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 대한 헐뜯기가 정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었다. 흥행에 있어 상수가 멀티플렉스라면 변수는 WWW를 타고 흐르는 대중의 입소문이다. 그 입소문은 과거에 비해 더 빠르고 더구나 매섭기까지 하다. 아마 스티븐 킹은 그 매서움에 반감을 느꼈을 터. 불호는 전염되고 때로 증오로 발전되기까지 한다.

영화 ‘백두산(감독 이해준, 김병서)’ 역시 불호가 만만치 않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기시감을 언급하는 의견으로, 아마 ‘백두산’은 상호텍스트성의 예로 기록될 한국 영화다. 먼저 이 영화가 어떤 요인으로 타 작품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첫 영화는 ‘더 록’이다. 인창은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한 스탠리 굿스피드와 유사점이 다수다. 폭탄을 다루고―인창은 대한민국 폭발물 처리(EOD) 대위고 스탠리는 FBI 화생방 전문가다―, 때문에 실전서 총기를 다뤄 본 적이 없고, 그로 인해 인정에 호소―인창은 준평에게 제발 살려 달라며 백두산에 가야 한다고 사정하고 스탠리는 화학탄이 샌프란시스코를 겨냥하고 있다며 존 메이슨(숀 코네리)에게 도움을 청한다―한다. 상부가 주인공 이력을 읊는 신은 어쩜 이토록 똑같을 수 있는지 복사기가 따로 없다.

준평과 메이슨도 쌍둥이다. 무력부 소속 1급 자원 준평과 영국 SAS 출신 ‘인간 병기’ 메이슨은 모두 상대역의 무력(武力)을 보조하는 반쪽이다. 각각 황해도 수용소와 알카트라즈 섬 등에 수용돼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외양마저 서로 판박이다. 두 남자를 잇는 매개가 부정(父情)인 것도 같다. 인창과 준평이 우정을 쌓아올리는 과정에는 백두산 분화로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서려 있고, ‘더 록’ 또한 VX 로켓에 자녀 안전이 위협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미국인과 스코틀랜드인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한다.

영화 ‘아마겟돈’도 모자이크의 일부다. 여기서는 더 많은 상호텍스트성이 발견된다. 재해에 무력한 인간·둘로 나눠진 팀·지휘 본부에 닥친 위기·인력이 요구되는 발파 등이 그것. 미국인 소개령에서는 ‘아마겟돈’의 데칼코마니 영화 ‘딥 임팩트’도 보인다.

충무로에서 상호텍스트성은 유구한 전통이고 관습이다. ‘마이 뉴 파트너’ 없이는 ‘투캅스’도 없다. ‘최종병기 활’이 ‘아포칼립토’를 참고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데이브’의 평행 이론은 또 어떤가. 하지만 그 상호텍스트성이 꼭 할리우드 영화와의 연관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이 땅의 맹점이다.

서강대학교 김욱동 명예교수에 따르면 상호텍스트성의 전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모든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고 다른 텍스트로부터의 영향은 필연적이라는 것. 둘째는 독자 역시 지금껏 읽어 온 텍스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이에 따르면 ‘백두산’은 ‘더 록’과 ‘아마겟돈’을 기억하는 두 감독, 제작자 하정우―영화 ‘싱글라이더’ ‘PMC: 더 벙커’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제작작이다―, 그리고 관객에 의해 다시 직조된 재창작물이다.

평론가 이합 핫산은 “글쓰기는 표절이고 말하기는 인용”이라 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렷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중첩이고 재현이라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이 만일 ‘백두산’ 측이 제 스스로를 옹호하는 데 쓰인다면 그것은 아전인수다.

물론 새로운 것도 있다. 우선 폭발에 따른 동북아 역학 관계 변화를 현실감 있게 표현했다. 무정부 상태에 빠진 북한, 북중 접경에 군사력을 집결한 중국, 전시작전통제권이 없는 한국군 등 대한민국향(向) 요소가 여럿 포진했다. 덱스터스튜디오가 개봉 엿새 전까지 심혈을 기울인 VFX도 볼만하다. 특히 강남대로 붕괴 신은 본작의 백미다.

하지만 배우 아무개로부터 은연 중 브루스 윌리스가 떠오르는 상호텍스트성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뿐이다. 또 거의 매 신마다 삽입된 웃음 유발점은 장르를 ‘재난 액션’에서 ‘코미디’로 변모시킨다. 연출 결함도 심각하다. 배우의 열연에도 불구, “이거(수갑) 풀리면 너 죽어” 하는 준평에게서는 그 어떤 공포도 느낄 수 없다. 아무리 배우 하정우라도 “나 너 못 쏴. 근데 넌? 나 왜 안 쏴?” 같은 대사는 살리려야 살릴 수 없는 사어다.

추정컨대 스티븐 킹의 인용은 맥락을 무시한 인용이다. 밥 딜런은 포크와 나이프를 다음에서 사용했다. “대단한 사람이 말했어. 만년필로 너를 털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어. 음식이 많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그 많은 포크와 나이프로 무언가를 잘라야 하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타나는 부의 불균형. 그것이 원 사용처였다. 하지만 새 포크와 나이프는 생존에서 시기(猜忌)로 은유가 180˚ 바뀌고 만다.

모든 인용이 늘 좋은 결과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릇된 결과도 낳는다. ‘눈높이를 낮추면 재밌는 영화’ ‘가족과 보기에 무난한 영화’ 등 요즘 ‘백두산’을 향한 중론은 ‘평범한 오락 영화’이다. 그 인용 덕에 시작부터 식상한 영화가 된 셈이다. 20년도 더 된 두 고전을 인용한 ‘백두산’은 익숙한 플롯과 등장인물에 기인한 상호주관성에 기대기보다, 클리셰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보다, 재밌는 오락물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했다. 눈높이를 낮추지 않아도, 굳이 가족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그냥 재밌는 영화 말이다.

스티븐 킹의 미시적 인용을 다시 한번 미시적으로 인용하자면 ‘백두산’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포크와 나이프다. 쳐내야 할 곳이 많다는 소리다. 12세 관람가. 128분. 손익분기점 730만 명. 총제작비 300억 원.(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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