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에 의해 창조된 것"

입력 2020-01-08 18:47   수정 2020-01-09 00:24

유사 이래 이탈리아 북부의 루비콘강을 건넌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역사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한 카이사르만 주목한다. 역사는 원주민이 살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를 ‘신대륙 발견자’로 기술한다. 누가, 언제,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1892~1982)가 1961년 출간한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는 역사적 사실의 상대성과 역사에서 역사가의 평가를 강조한 책이다. 국내에서 ‘E H 카’라는 약칭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역사란 역사학자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명제(命題)를 남겼다.

"사실보다 역사적 평가가 중요"

《역사란 무엇인가》는 카가 1961년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여섯 차례 공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회와 개인,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진보로서의 역사, 지평선의 확대 등 모두 여섯 개 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에 의해 창조되고, 역사에는 우연이 없고, 역사는 종국적으로 진보한다는 게 요지다.

카의 이 같은 역사관은 학계 주류인 독일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의 실증사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랑케가 “사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게 역사가의 임무”라고 규정한 데 반해 카는 “역사가의 해석이 있어야만 역사적 사실이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역사란 과거에 객관적으로 존재한 사실을 단순히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평가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역사가의 주된 일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가가 이를 창조하기 전에는 어느 역사가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카는 역사가의 해석이 중요한 만큼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역사가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역사상 순수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 항상 굴곡되기 때문이다. 역사책을 읽을 때 관심을 둬야 할 일은 어떤 내용이 실려 있느냐가 아니다.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 일원이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가의 사회·사상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카는 역사 해석이 정당하고 옳은 방향으로 진보해야 한다고 믿었다. 현재를 이해하고 더 나아질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전제 아래 과거 사실을 현재로 가져와 해석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진보를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는 일종의 ‘역사 결정론’이다. 카는 역사(진보)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각성과 주체적 노력을 중시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1980년대 국내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 역사적 필연성, 진보에 대한 확신,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간 노력을 강조한 내용이 당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투쟁하던 이들의 지향점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카의 역사관은 실증사관 일색이었던 당시 학계에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하지만 역사가의 ‘역사적 평가’를 중시하는 바람에 특정 세력과 이념집단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왜곡을 일삼는 데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카가 말한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는 결국 지식과 권력 관계 안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 특정 집단의 ‘일방적인 대화’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란 이름으로 역사왜곡" 비판 거세

카가 역사 인식의 중요한 요소로 꼽은 역사가에 대한 검증을 통해 그의 편향성을 유추할 수 있다. 카는 스물네 살 때인 1916년 영국 외교부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20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독일을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맺어진 베르사유조약의 희생자로, 히틀러를 경제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지도자로 칭송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옹호 대상을 스탈린으로 바꿨다. “소련은 스탈린의 선의(善意)에 의해 발전하고 있다” 등의 친소(親蘇)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소련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눈먼 사람” “치유가 불가능한 사람”이란 악담을 쏟아냈다. 국내에서 그의 저서가 1980년대 금서(禁書)로 묶인 것은 소련에 의해 나라가 분단되고 6·25전쟁 참화를 겪어야 했던 한국적 상황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진보한다’는 카의 명제도 실상은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을 채용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 맥이 닿는다는 비판도 있다. 인간 사회와 학문에서 ‘필연적인’이라는 단정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사례에서 보듯 선동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보다 사실적 해석을 강조한 그의 책이 영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한국에서 더 유명한 것은 아이러니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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