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금동향로·금동관…개방성·다양성이 찬란한 백제문화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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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2-21 17:21   수정 2020-02-22 00:28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금동향로·금동관…개방성·다양성이 찬란한 백제문화 낳았다


방탄소년단(BTS)의 음악이 연속 3회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는 뉴스가 떴다. 유라시아대륙을 몇 번 횡단했는데, 매번 한류(韓流)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란의 이스파한시에서는 싸이의 말춤을 시민들과 함께 췄고,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횡단할 때는 “주몽”을 외치며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청년들과 신나게 웃어 젖히기도 했다. 2019년 한국의 문화콘텐츠 수출은 103억달러다. 영화 ‘기생충’은 작년 11월 말까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박스오피스 매출이 1억1000만달러에 이른다. 정보, 통신, 건축 등을 포함한 문화산업의 규모와 이익은 이보다 훨씬 더 크다. 기쁘고도 놀랄 만한 현상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 같은 문화산업 및 문화수출 현상이 없었을까? 백제가 멸망할 때 인구는 고구려보다 많은 76만 호(戶), 약 380만 명이었다(《구당서》 《삼국사기》). 농경, 어업은 물론 상업, 무역이 활발하면 국부가 창출되고 경제력이 강해진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시대에 예성강 이북까지 북상했고, 마한 지역을 장악한 뒤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이어 신라와 고구려를 압박했다. 이에 더해 ‘요서 진출설’과 ‘양자강 유역 점유설’이 주장될 정도였으니 군수산업은 분명 활성화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환경과 국민정서, 오랜 문화전통으로 인해 문화가 발달했고, 문화정책에 힘을 더 기울인 듯하다.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절터 유적에서 이를 확신할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됐다.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높이 62.5㎝, 무게 11.8㎏의 ‘금동대향로’다. 이 향로는 뚜껑, 몸체, 받침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받침대는 구름 위를 나는 용의 모습이다. 몸체 하단엔 연꽃 모양을 그리고 뚜껑은 산 모양으로 만들어 동물과 악사 등으로 장식했으며, 뚜껑 꼭대기에는 봉황(또는 주작)을 세워 놓았다. 중국의 박산향로를 모방했다는 설과 전체 형태를 빼놓고는 독창적인 우리 식의 예술품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고구려 무용총, 쌍영총 등의 수렵도나 오회분 4, 5호 묘의 신들을 그린 평면 벽화를 입체적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청동제품의 질적인 우수성은 차치하더라도, 특이한 형태와 정밀하고 상징적인 세부 장식들이 표방하는 사상성과 ‘지미(至美)의식’은 귀걸이, 목걸이, 금관 등에 구현된 기술력과는 또 다른 차원의 백제 공예품이다. 경주에 세워진 황룡사 9층탑은 장중하고 화려한 상륜부까지 합하면 높이가 약 80m에 이른다. 이 대역사를 불과 2년 만에 완공시킨 기술자 집단은 백제인 아비지(阿非知)와 함께 온 200명의 기능인들이다.

차원이 다른 예술품 금동대향로

백제는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국가 간 경쟁에서 유리하도록 일본 열도에 정치적·사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데 문화를 이용했다. 초기부터 우수한 철정 등을 비롯해 칼과 거울 등의 보물을 보냈다. 근초고왕 때는 철기 장인 탁소를 왜국으로 파견했다. 말(馬)을 전달한 아직기와 뒤이은 왕인박사는 논어와 천자문을 갖고 건너가 백제문화를 전달하고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때 옷을 짓는 봉의공도 파견했다.

규슈 서부 해안과 가까운 구마모토현에 후나야마 고분이 있다. 1997년까지도 폐허처럼 방치된 이 전방후원분에서 92건의 유물이 출토됐다. 금동관모는 무령왕릉과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다. 지금은 비슷한 유물들이 공주 수촌리 고분, 나주 신촌리 고분을 비롯한 여러 군데에서 발견됐다. 또 14개의 칼 가운데 은상감(銀象嵌)으로 75개 글자가 새겨진 85㎝의 큰 칼이 있다. 관모·신발의 유사성과 백제인들의 항로를 고려하면, 이 칼은 월북 역사학자 김석형의 주장처럼 ‘백제의 개로왕(본문에는 미즈하대왕·瑞齒大王)이 신하로 데리고 있던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다. 이 밖에 이소노카미(石上)신궁에 보관된 것으로, 100번이나 두들겨 단련한 철로 제작해 백제 임금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와 오사카 사천왕사에 보관된 쇼토쿠 태자가 사용했다는 ‘칠성검’ 등은 백제 칼이다. 아마 ‘이태가’ ‘장안’ 같은 백제 기술자들이 앞선 강철 단조기술과 열처리기술 등을 활용해 제작했을 것이다. 아스카의 작은 언덕인 후지노키 고분은 6세기 중반의 것인데, 여기서 나온 백제계 금동관은 정교함과 화려한 금빛 색상으로 신라 금관만 떠올리던 우리의 통념을 깨뜨렸다.

불교를 정치·경제 목적으로도 倭에 전해

백제의 대(對)왜 정책은 6세기에 들어서 불교문화를 정치·경제적인 목적으로 전파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수도를 부여로 옮긴 성왕은 높이 16척의 ‘장육불’을 제작해 왜국에 기증했으며, 노리사치계를 금동불상, 번개(幡蓋·불상 위를 덮는 비단), 경론(經論) 등과 함께 파견했다. 또 588년(위덕왕 35년)에는 승려들과 조불공, 조사공(명주실을 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노동자), 노반박사(탑 기술자), 기와박사, 화공 등을 파견해 아스카사를 조성하는 데 도움을 줬다. 본존인 아스카 대불을 제작한 구라쓰쿠리도리(鞍止利)는 백제계라고 한다.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는 옛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독일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인간 실존의 참다운 모습을 이토록 표현한 예술품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품격이 다른 예술품이다. 제작 주체를 놓고 많은 설이 있었지만, 형태가 우리 것들과 비슷한 데다 목재가 한반도에서 자라는 적송으로 밝혀지면서 백제 또는 신라 제품이거나, 왜국에 정착한 조불사가 만든 것으로 정리됐다. 또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호류지(法隆寺)의 대보장전에는 209㎝의 훤칠한 키와 우아한 손끝으로 옷자락을 살며시 든 7세기께 관음보살상이 전시돼 있는데,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이 불상에는 ‘백제’라는 이름이 붙은 채로 내려왔다.

‘백제’ 이름 붙은 호류지 관음보살상

백제는 직조산업이 발달해 6세기께는 베·비단·명주실·마 등을 세금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4세기에 재봉기술을 가진 공녀(工女)를 왜국에 보냈고, 418년에는 백색 명주를 10필 보냈다. 또 《고사기》에는 백제인 수수허리(須須許理)가 빚은 술을 마신 왜왕이 취했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도 일본에는 수수허리를 모신 술 신사가 많다.

백제는 이런 문화산업 외에 문화콘텐츠에 해당하는 예술품을 왜국에 기증하고 수출했다. 《삼국사기》 악지는 백제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의복과 모자, 가죽신발 등을 소개했고, 《수서》에도 백제악을 소개했다. 백제금동대향로에는 5명의 악사가 등장하는데, 비파 등은 중앙아시아와 관련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554년에 백제 악사인 삼근(三斤), 기마차(己麻次), 진노(進奴), 진타(進陀) 등 4인이 다른 악사들과 교대하려고 왜국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상황은 일본의 《악가록(樂歌錄)》에도 기록돼 있다. ‘구다라가쿠(百濟樂)’로 알려진 백제 음악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고려악(고구려 음악)과 함께 일본 음악의 토대를 이뤘다. 춤은 백제인인 ‘미마지’가 유명하다. 그는 오나라(고구려설도 있다)로 가서 기악과 춤 등을 배운 뒤 왜국에 와서 가면무(탈춤)를 가르쳤다. 이 춤에 사용되던 가면은 나라(奈良)의 도다이지(東大寺)에 전한다. 712년 출판된 《고사기》를 쓴 오노야스마로(太安萬侶)도 백제 유민이었다.

씨름·바둑 같은 유희도 수출

백제는 이 밖에 주거·성벽·저수지·도로 등의 토목기술, 각종 군수물자, 의약(채약사), 씨름, 바둑 등의 유희도 수출했다. 오늘날의 한류 현상 및 문화상품의 수출과 같다. 심지어는 황칠을 한 명광개(갑옷), 도금한 갑옷, 무늬를 새긴 도끼 같은 문화 예술품을 중국에 보낸 백제의 문화산업과 기술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국가가 설치한 마부·도·목부 등의 내관과 사군부(군수산업), 사공부(토목산업), 주부(직물) 등의 외관이 문화산업을 담당했지만, 다른 원인은 없을까? 중국의 《북사》와 《수서》의 백제전에 보면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와 중국인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외국인들이 섞인 개방적인 사회이며, 다양한 문화를 교환하고, 무역이 활발했던 것도 강점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백제는 문화 전성기를 구가했는데도 오히려 국제 질서에 어두웠고, 왕의 사치가 심했으며, 국론이 분열됐고, 망국의 길로 접어들더니 끝내는 멸망했다. 역사상에는 그리스, 로마, 송나라처럼 기간산업이 아니라 문화산업의 지나친 발달로 인해 정신과 국력이 허약해지다 멸망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대중문화가 번성하고, 한류 현상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이때 국가와 사회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사회 전체의 발전 및 미래를 위한 노력과 정책도 함께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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