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당나라 꺾고 완성한 삼국통일…원조선·고구려 계승 아쉬운 '반쪽 통합'

입력 2020-04-24 17:18   수정 2020-04-25 01:51


국가적 위기는 대부분 대혼란과 체제 붕괴로 이어진다. 고비를 넘겨 극복하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다.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이 그렇다. 신라는 6세기 초까지 약소국이었는데 약 150년 후인 668년 삼국을 통일했다. 거기까지는 1단계로 볼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리는 수준이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진정한 실현은 2단계인, 8년에 걸친 나당(羅唐)전쟁에서 승리하고 내부 안정을 완성했을 때다.

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우산국 복속(512년)을 시작으로 전략지구를 체계적으로 장악해 외교망을 확장하고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또 기존 체제와 신앙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인 끝에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진흥왕 33년에 사찰을 세우고, 전사한 사졸(士卒)들을 위로하는 ‘팔관연회’를 열어 사상의 통일을 유도했다. 통일사업의 주체인 자장, 의상 등은 유학 승려였고, 전통신앙과 불교가 조화된 화랑도는 종교 갈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신라의 통일정책 중 의미있는 것은 국제질서에 진입하고,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했다. 642년 의자왕에게 40여 개 성을 빼앗기고, 이어 대야성을 공격당해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달라는 제의를 거부해 옥에 갇혔다가 탈출했다. 고립무원 신세인 신라는 643년 당나라에 출병을 원하는 ‘걸사표(乞師表)’를 보냈으며, 계속해서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고당(高唐)전쟁이 벌어질 때 군사 3만 명을 파병했고, 그 와중에 백제에 7개 성을 빼앗겼다.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당나라를 방문해 태종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신라와 당은 각각 백제(평양 이남)와 고구려 영토를 갖기로 합의했다(《삼국사기》).

결국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은 성공했고, 신라는 당나라 관복을 차용했으며, 고종이 즉위하자 연호를 폐기한 뒤 당의 연호를 사용했다(문정창, 《한국고대사》). 귀국 도중 고구려 수군에게 붙잡힌 김춘추가 탈출에 실패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663년 백강전투 이후 국력 강화

660년 여름(6월), 13만 명의 당나라군은 서해 중부를 횡단해 덕적도에 도착, 태자가 지휘한 신라함대 100척과 합세했다. 나당 연합수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한 김유신의 5만 군대와 합세해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사비성을 함락한 뒤에 웅진성으로 도피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해 말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며 신라의 지원을 요구했다. 백제와 금마군(익산 일대)에서 전투하다 죽은 무열왕을 계승한 문무왕은 수레 2000여 대에 쌀과 벼 등을 실어 평양성으로 보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습격과 대풍·대설로 인해 군사와 말이 얼어죽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신라는 663년 백제·왜 연합군을 백강전투에서 물리친 뒤 국력이 강화됐다. 666년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귀순하자 문무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고구려를 멸(滅)하는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문무왕은 친정군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북상해 당군의 평양성 도착을 기다렸으나, 당군이 패퇴하자 회군했다. 668년 당고종은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깃발을 주면서 고구려 공격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신라는 대군을 파견했다.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660년 백제를 공격할 때도 무열왕은 군사편제상에서 소정방의 지휘를 받았다. 당고종은 백제의 항복을 받고 귀국한 소정방에게 왜 신라를 치지(伐) 않았느냐고 힐난했다. 663년에는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으며(《삼국사기》), 전쟁준비를 했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

신라는 유민들을 활용해서 민족전쟁으로 전환시키면서 당군과 백제군(당나라가 파견한 부여융이 지휘하는 군대)을 격파하고, 사비성까지 탈환해 백제 영역을 완전히 차지했다. 671년 10월에는 당나라의 군수선 70여 척을 격파했고, 고구려 복국군과 연합해 672년에 백빙(수)산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673년에는 함선 100척을 서해에 배치해 초계활동을 벌였다. 675년에는 칠중성(적성면)에서 패했으나, 매초성(양주)전투에서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했다.

唐 내부 혼란·고구려 유민 활용

신라의 강경책이 성공한 비결은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이 자국에 유리한 것을 파악하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고종이 병에 걸려 부인인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국이 어지러웠다. 제1 투르크 제국 멸망 후에도 투르크족의 반란은 계속됐고, 거란은 요서지방에서 위협적으로 성장 중이었다. 충돌을 반복하던 토번은 670년 18주를 빼앗았고, 677년에도 당나라를 패배시켰으며, 당나라의 종속국으로 만든 청해성과 감숙성 남부의 토욕혼을 멸망시켰다. 고구려 유민들도 요동과 요서에서 복국전쟁을 펼치고 있었다. 당나라 내부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676년 설인귀의 수군은 기벌포 해전에서 패하자 완전히 철수했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화해·공격·굴복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립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민족통일 사업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사찰 등 건설하며 정신 통일·공동체 복원

신라는 당나라의 문화, 의복, 제도, 연호, 책봉 등 많은 것을 선택해서 정체성과 자의식이 약해졌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탓에 국토가 황폐해졌고, 질병과 군량미 공급으로 농민들의 삶은 힘들어졌다. 또 외국 군대의 공격과 장기간의 진주 등은 동족 간, 지역 간에 뿌리 깊은 불신과 갈등을 낳았다. 정부는 유민들에게 관직을 주고, 군대에도 편입시켰으며(신형식, 《통일신라사연구》), 부석사·감은사 등 사찰을 많이 건립해 공존의식과 공동체를 복원하려고 했다. 원효(화쟁사상)를 비롯한 승려들도 전쟁의 상처와 회한, 민족분열 등을 치유하는 일에 동참했다.

신라는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과는 전쟁도 불사했다. 선박 300척을 동원한 일본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해양방어체제를 증강했다. 732년 발해의 공격을 받은 당나라의 요구에 군사를 파견했고, 이후 발해와는 냉전체제를 지속했다. 8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신라는 안정을 찾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비로소 삼국통일의 성과를 누렸다.

8세기 중반에야 삼국통일의 성과 누려

신라의 삼국통일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종족적 통합을 부분적으로 성공시켰을 뿐인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재분단된 남북국 시대가 되면서 원조선과 고구려 문화는 불완전하게 전승됐고, 자원·영토도 상실했다. 만주지역의 여러 종족은 훗날 요·금·원·청 등으로 변신해 한민족을 압박했다. 남쪽에서는 일본국이 탄생해 경쟁과 적대적인 관계로 변질됐다(윤명철, 《역사활동과 사관의 이해》).

남북한의 적대관계와 남한의 동서 분열, 한국이 속국이었다고 세계에 선언하는 중국의 무한팽창, 한민족의 영구분열을 획책하는 일본, 해양 진출의 교두보를 원하는 러시아, 대륙 세력을 막는 초병 역할을 하기를 원하는 미국…. 이런 혼란의 시대에 신라인들의 애국심, 세계를 보는 눈, 인재 양성책 등은 남북통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방법론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은 31회부터 한경닷컴(www.hankyung.com)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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