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재팬'과 '젠더'…스토브리그 떠올랐던 민주당 총선 전략

입력 2020-05-06 10:04   수정 2020-05-06 10:20

올해 가장 히트를 쳤던 드라마는 SBS에서 방영된 '스토브리그'였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 아슬아슬한 막판 역전극 없이도 스포츠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

스토브리그(stove league)란 난로(stove)를 피울만큼 추운 겨울 다음 시즌을 대비해 선수를 영입하고 팀을 구성하는 일련의 작업을 뜻한다. 자유계약(FA)이나 트레이드를 통해 필요한 선수를 영입하고, 감독 코칭스태프를 선임하기도 한다. 이 과정이 정규 리그만큼이나 흥미롭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다.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인기를 끈 것은 국내 프로야구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을 통해 팀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팀보다는 개인의 안위만을 챙기는 선수를 타 팀으로 이적시키는 대신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선수를 영입하는가하면, 모기업의 지시에 휘둘리지 않고 팀 운영의 정도(正道)를 지키려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드라마의 열기는 국내 프로야구팀 '롯데자이언츠'의 젊은 성민규 단장 영입과 '프로세스'를 통한 트레이드, 팀 운영 변화로 인해 현실까지 옮겨졌다.

단장 중심의 스토브리그는 이미 미국 프로야구(메이저리그)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 이뤄졌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테오 엡스타인'시카코컵스 사장이다. 롯데 성 단장의 프로세스를 처음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엡스타인 사장은 미국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예일대학교 출신이다. 2002년 28살에 메이저리그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명문 보스턴레드삭스의 단장이 됐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4년에는 86년만에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보스턴레드삭스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기더니, 2016년 시카고컵스에서는 108년 묵은 '염소의 저주'를 깨고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엡스타인이 스토브리그에서 성공했던 대표적인 전략 중 하나는 타자는 키워서 쓰고, 투수는 영입해서 쓴다는 것이었다. 잠재력이 실력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타자는 육성해 저렴한 가격에 쓰고, 부상 위험 등으로 변수가 많은 투수는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정상급 선수를 데려와서 팀의 중심을 지킨다는 전략이었다. 그의 혜안은 통했고 미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지독했던 두 개의 저주를 잇따라 깨고, 명예의 전당 헌액이 유력한 현역 인물이 됐다.

정규 시즌에 필요한 전력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선거는 스토브리그와 비슷하다.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선거, 그 중에서도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은 정기국회·국정감사 등 정치의 정규시즌을 치르기 전 좋은 인력을 보강해야하기 때문에 그들만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은 선거 전략에서부터 상대를 압도했다. 구태의연한 생각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떠올랐고, 주도 면밀함에서는 엡스타인 단장의 전략이 보였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모든 선거 이슈를 잡아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외부에서 바라 본 민주당의 숨겨진 필승 전략은 '노재팬'과 '젠더이슈'였다. 대립구도가 명확했고, 유권자들이 결집하기 쉽게 만들어줬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정부의 일본에 대한 압박과 대립 수위가 심화됐고,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n번방 사태'가 터진 것은 참 공교롭다 할 수 있다.



민주당의 전략이 빛났던 곳은 21대 총선에서 가장 이슈가 됐던 '서울 동작을'과 '서울 광진을'이었다.

서울 동작을은 노재팬 전략이 통한 선거구로 볼 수 있다. 상대는 4선 출신의 야당 원내 대표를 지낸 나경원 통합당 의원이었다. 경험과 관록, 전국적인 인지도, 해당 지역구에서 3선을 했다는 점에서 쉽게 꺾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약점은 나 의원과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이름이 합쳐진 '나베'라는 오명이었다. 민주당은 노재팬을 부각시키는 대신 젠더 이슈를 지우기 위해 이수진 전 판사로 맞불을 놨다. 어중간한 남자 후보가 갔다면 승리를 장담하진 못했겠지만 같은 여성, 같은 판사 출신을 전략 공천했고 결국 승리했다.

서울 광진을은 젠더 이슈 전략이 먹혔다. 오세훈 통합당 후보는 전 서울 시장이라는 이력, 호감가는 이미지 등을 감안할 때 막강한 상대였다. 이미 1년전부터 밭을 갈고 닦은 만큼 공략이 어려워 보였다. 민주당의 선택은 현역 청와대 대변인인 고민정 당선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을 후광으로 입은데다, 때마침 차명진 통합당 후보의 막말까지 나오면서 젠더 이슈는 더욱 부곽됐을 터다. 개표 막판까지 엎치락 뒷치락하다가 3000표 내외라는 박빙의 승부 끝에 고 당선자가 승리를 거뒀다.

민주당의 두 지역에 대한 공천 전략은 졌을 때의 위험까지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치밀함을 엿볼 수 있다. 나 의원, 오 후보가 선거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대선후보급 다선의원이 아닌, 정치 경력이 일천한 초짜 신인들이었다. 이겨도 생색내기 어렵고, 지면 대선후보로서의 위용에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민주당 입장에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민주당의 스토브리그 결과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유례없는 거대 여당(180석)이 탄생했다. 두말할 나위없는 압도적인 승리다. 민주당 당선자 수와 면면을 살펴볼 때 정규 시즌 우승은 따놓은 당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더 재밌는 법이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전체 팀연봉 1위인 보스턴레드삭스가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탈락하는가하면, 2015년에는 메이저리그 전체 30개팀 중 팀 연봉이 19위에 그쳤던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잘 뽑았다고 판단했던 선수가 예상치못한 부진을 겪기도 하고, 기대도 안했던 선수가 MVP급 활약을 펼치기도 한다. 스토브리그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정규시즌의 묘미다.

팬들은 짧았던 스토브리그를 끝내고 난뒤 본격적으로 긴 정규시즌을 즐긴다. 스토브리그가 입맛을 돋우는 전체요리라면 정규시즌은 메인요리인 셈이다.

정치에서 국민들이 리그를 즐기는 시점은 딱 선거 끝날 때까지인 스토브리그만인 듯 하다. 4년 동안 내가 뽑은 국회의원, 선택한 정당이 어떤 법안을 내는지, 국회 내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정규시즌이 남아있다. 나의 생업과 관련된 일들이 국회에서 정해진다. 야구의 정규시즌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이제 막 한국 정치는 정규시즌 개막을 앞두고 있다.

이동훈 기자 lee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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