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불완전한 삶을 따라다니는 착각

입력 2020-06-11 18:23   수정 2020-06-12 03:03

“착각은 우리 앞에 옆에 뒤에 그리고 언제나 있다. 방향을 가리키는 전치사와 후치사 사이에 삶은 있다가 간다. 방향을 잃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 발견은 없다. 다만 어떤 상황을 착각으로 살아내는 미학적인 아픔의 순간이 시에는 있을 뿐이다. 발견의 어두운 그늘을 걷는 것이 어쩌면 시인의 일일지도 모르겠다.”

2018년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이 2014년 문학계간지 ‘발견’에 실은 ‘연재를 시작하며’란 글의 한 대목이다. 허 시인은 2014~2018년 ‘발견’에 모두 산문 여덟 편을 연재했다. 그 글들이 산문집 《오늘의 착각》으로 모아졌다. 산문집의 ‘작가의 말’은 6년 전 ‘연재를 시작하며’로 갈음했다.

제목처럼 수록된 산문들은 ‘착각’에 관한 이야기다. 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를 ‘착각 여관’으로 명명한다. 시라는 이름으로 그가 지상에 차린 여관에 손님으로 온 착각이 어느새 여관 이름마저 ‘착각’이라고 바꿔놓았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자신이 보고 겪은 뉴스, 읽은 책, 들은 음악, 만난 사람, 냄새를 맡은 자연 속에서 스스로 ‘착각’이 된다. 이를 통해 자신과 외부의 경계 사이에서 생긴 착각이라는 균열과 착란이라는 혼돈이 그에게는 한없이 귀한 정신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물고기 모빌 혹은 화어(花魚)’란 제목의 산문에서 시인은 친구가 선물해준 물고기 모빌을 잘 말려 걸어놓은 화어로 착각한다. 그러고는 ‘세월호의 기억’을 발견해낸다. 사유의 시간을 주는 모빌에서 영혼을 더욱 잠식할 잔잔한 불안의 물결을 느낀다. “람페두사라는 이탈리아의 한 섬이 과거 그리스인과 로마인, 아랍인들이 시간을 두고 경계없이 촌락을 이루며 살았던 공통의 고향이었다”는 시인의 착각은 아프리카에서 그 섬으로 건너온 난민들의 모습에서 허망하게 깨진다. 죽음의 경계를 넘어 섬에 도착했지만 유럽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완강한 경계에 맞닥뜨린 난민들에게서 시인은 “이곳에 있는데 이곳에 없다는 착각이 착각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는 데에서 섬뜩함을 느낀다”고 털어놓는다.

이렇듯 시인의 ‘너무나 인간적인’ 착각들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에서 불안해했던 그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시인의 인생은 그 세계의 불완전함을 시로 절망하고, 그 너머에 있는 존재의 이유를 시로 묻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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