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코로나가 바꾼 여름휴가

입력 2020-06-15 17:19   수정 2020-06-16 00:42


정보기술(IT) 회사에 다니는 이 대리는 요즘 출근 후 이메일부터 연다. 올초 ‘취불(취소불가)’ 조건에 예약한 스페인 남부 여행 상품이 환불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같은 천재지변은 환불 요건에 해당한다”며 매주 따지고 있지만 대답은 여전히 ‘노(no)’다. 이 대리는 “재택근무로 ‘집콕’에 이골이 났는데 휴가 역시 집에서 보낼 것 같다”며 “해외 대신 국내 캠핑여행을 다녀올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낮 기온이 연일 30도를 오르내리는 6월. 예년 같으면 근무시간 틈틈이 눈치를 봐가며 휴가 계획을 짜는 시기다. 올해는 분위기가 다르다. 특히 재택근무를 장기간 시행하고 있는 기업에선 여름휴가의 ‘여’자도 입 밖에 내기가 조심스럽다. 상사가 먼저 여름휴가 얘길 꺼내주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아 속을 태우는 김과장이대리들이 적지 않다. 코로나19 사태로 해외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국내여행도 맘 편하게 갈 수 없는 여름. 직장인들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열 명 중 한 명만 휴가 계획

여름휴가는 언제, 어디로 갈지 미리 정해야 한다. 그래야 천차만별인 항공료와 숙박비를 아낄 수 있다. 하지만 올해는 여행 계획을 잡는 것조차 포기한 이른바 ‘휴포자’(휴가를 포기한 사람)가 급증하고 있다.

국내 한 IT 대기업에 다니는 장 대리는 부장에게 “여름휴가 계획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가 면박을 당했다. “두 달 동안 재택근무로 놀았으면서 또 쉴 생각만 하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장 대리는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놀아달라고 해 재택근무가 더 힘들었다”며 “차라리 출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휴가까지 가지 말라고 하니 억울하다”고 말했다.

올해 코로나19 사태로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는 직장인은 열 명 중 한 명(9.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잡코리아가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2일까지 직장인 102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이 중 휴포자는 31.9%에 달했다.

계획적 휴가가 어렵다는 판단에 하루이틀 동안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휴가를 가겠다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미디어 회사에 다니는 한 대리는 7~9월 매달 이틀씩 휴가를 쪼개서 가겠다고 선언했다. 부장이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 대리는 “해외여행을 못 가니 국내여행이라도 여러 곳 가고 싶다”고 말했다.

‘산스타그램’ 시작한 최 사원

따스한 햇살 아래 이국 해변에 누워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휴가는 이젠 옛말이다.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행(行) 비행기에 몸을 싣기도 부담스럽다.

소문난 수상스포츠 마니아인 한 증권사의 진 과장은 이런 상황이 원망스럽다. 수영·스킨스쿠버 등 물에서 하는 모든 놀이를 ‘아쿠아맨’(DC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영화 주인공)보다 좋아한다고 자부하지만 올해는 집에서 반신욕만 하고 있다. 물이 그리운 진 과장은 여름휴가에 큰마음을 먹고 단독 수영장이 있는 국내의 한 풀빌라를 예약했다. 그는 “필리핀에서 스킨스쿠버를 하고 오는 가격보다 비싸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할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 결정했다”고 말했다.

실내보다 야외 활동이 낫다는 생각에 등산을 막 시작한 ‘산린이’(산+어린이)도 적지 않다. 한 화장품 회사 마케팅팀의 최 사원(26)은 산 정상에 올라 인증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산스타그램’(산+인스타그램)을 최근 시작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후회가 밀려온다. ‘감성캠핑’을 하겠다며 백패킹용 캠핑 장비까지 구입했는데, 부쩍 늘어난 등산객에 동해안 유명 캠핑장에선 텐트를 펴기도 쉽지 않다. 일출을 보며 운치를 느끼기는커녕 밤새 술을 먹고 떠드는 취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SNS를 보고 주말에 산이나 한번 같이 가자고 하는 선배까지 나타나 캠핑 장비를 중고시장에 내놨다”고 토로했다.

아내 등쌀에 해외여행을 한 해 두세 차례 다니는 중소 제조업체의 조 과장은 요즘과 같은 상황이 조금은 반갑기도 하다. 한 번에 수백만원을 써야 하는 해외여행 대신 올해는 캠핑을 시작했다. ‘간단한 텐트와 돗자리 정도만 사면 되겠지’란 생각도 잠시. 100만원을 훌쩍 넘는 텐트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타프, 의자와 테이블, 랜턴, 침낭, 베개, 침대 역할을 하는 에어매트 등을 사다 보니 500만원을 썼다. 첫 캠핑 후 미니 빔프로젝터를 사달라는 아이들 성화에 50만원을 추가 지출했다. 조 과장은 “이렇게 많이 샀는데 ‘캠린이’(캠핑+어린이)를 막 벗어난 수준이라는 아내의 말이 무섭게 느껴진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못 놀 바엔 ‘집콕’

코로나19 이후 북적거리는 곳을 피해 온 건설회사의 박 과장은 ‘집콕’을 선택했다. 집에 머물며 재테크 포트폴리오를 다시 짜기로 했다. 이번 상승장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투자를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는 “반등 기미를 보이는 부동산을 우선 살펴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여유자금을 ‘올인’해 주식을 살 것”이라며 “수십만원의 비용을 내고 부동산 실전 투자 강의도 신청했다”고 말했다.

해외여행을 해마다 다녔던 ‘해외파’의 국내 유턴 현상도 뚜렷하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를 외치며 저축보다 소비를 즐기던 장 과장(34)은 입사 이래 처음으로 여름휴가를 국내에서 보낼 예정이다. 집 옥상에 마련한 ‘집콕 캠핑’ 시설에 지인들을 초대하고 있다. 장 과장은 “캠핑용 해먹에 앉아 바라보는 남산의 운치가 네팔 히말라야산맥에 뒤지지 않는다고 스스로 위로한다”고 말했다.

패션회사에 근무하는 정 대리는 휴가 중 피부시술을 받을 예정이다. 지난 몇 년간 휴가를 앞두고 피부 시술과 해외여행 사이에서 고민하다 여행을 선택했다. 그는 “이번 여름 휴가엔 선택지 하나가 자동으로 없어진 꼴”이라며 “여행을 못 가게 돼 아낀 돈을 피부시술과 마사지 등에 쓰겠다”고 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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