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실패한 까닭은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08-09 08:00  


역사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객관화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여몽(원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이라고 부르는 전쟁을 중국은 ‘원일(元日)전쟁’이라고 지칭한다. 일본은 ‘분에이(文永)의 역’, ‘코안(弘安)의 역’이라고 부른다. 천황의 용어로 표현하는 일본적인 자의식과 승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1274년 음력 10월 5일부터 10월 20일까지 고려군 1만4700명, 몽골·한군 2만5000명, 900여 척의 전선이 동원돼 일본군과 전쟁을 벌였다. 이어 1281년 음력 5월 21일에서 7월 7일까지 몽골군 3만명, 고려군 2만7000명, 강남군 10만명 등 4000여 척의 다국적군이 일본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우리는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하려다가 해안에서 가미카제(신풍)에 휘말려 대부분 배가 침몰하고, 군인들은 전멸했는데, 고려 배는 튼튼해서 피해를 조금만 입었다고 알고 있다. 기형적인 국제전의 실상은 어떠했으며, 주체는 어느 나라였을까? 또 고려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병사들과 백성들의 피해는 얼마나 됐을까?
1차 전쟁 발생의 과정과 전투

4대 황제에 오른 쿠빌라이에게 몽골제국이 부여한 최대과제는 남송의 멸망과 동방의 완전한 정복이었다. 일본열도는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었다. 다만 일부의 견해대로 남송을 공격할 때 외교적인 배후 역할 정도였다. 쿠빌라이칸은 1226년에 고려에 일본 정벌의 의도를 선언하고 협조를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1268년 6월에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달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신을 억류까지 했다. 3번째로 파견한 사신 또한 무시했다.

드디어 원정이 결정되고, 고려는 정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해 5월 그믐까지 대선과 소선(小船) 합해 900척을 건조했고, 물품도 모두 갖췄다. 변산반도 지역과 나주의 천관산 지역의 목재를 활용해 전선 300척, 빠른 공격선 300척, 급수선 300척 등 900척을 불과 4개월 반에 완성한 것이다. 고려의 조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고, 계속된 전쟁에도 국력, 노동력 등이 남았음을 알려준다.

드디어 음력 10월 3일. 원나라의 홀돈(忽敦·
쿠둔)과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한군(蒙·漢軍) 2만5000명과 군사 8000명, 사공(梢工)·수로안내자(引海)·선원(水手) 6700명을 포함한 1만4700명의 고려군이 승선한 전함 900여 척이 마산의 합포를 출항했다.(《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대한해협의 해류와 조류, 북서풍을 고려하면 부산(가야 포함) 등이 아니라, 거제도 이서 해안을 출항해야 대마도에 도착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1983년에 뗏목 해모수호로 일본열도까지 항해할 때 옛 가야인들, 여몽연합군과 같게 거제도 남단에서 출항했다. 대한해협을 건너 음력 10월 5일에 대마도 남쪽에 상륙해서 고모다 해안(小茂田浜)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이 해안에는 신사 등 관련된 몇몇 유적들이 있는데, 입간판에는 ‘원구(元寇)’가 침입했다고 기록돼 있다. 규슈 지역도 같지만, 일본은 고려가 공격한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연합군은 곧 출항해 음력 10월 14일 늦은 오후에 50여 km 떨어진 이끼섬에 상륙하고, 15일에 점령했다. 2일 후에는 불과 25여 km 남짓한 섬에 상륙했고, 20일에는 후쿠오카시의 중심부인 하카타만에 구축한 망루를 붕괴시키면서 상륙을 완료했다. 국제전과 해양전에 능숙한 대병력이 약체의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전광석화처럼 진군한 것이다. 이 시기 양군의 해상전을 벌이는 장면을 그린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서 전선의 규모와 구조, 성능, 병사들이 사용한 무기 등을 알 수 있다. 특히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매우 강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안에서 평지로 20여km 진군하면 일본의 서경이며, 군사사령부인 다자이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663년 백강 해전에서 패배한 백제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을 방어할 목적으로 구축한 다자이후(大宰府)에 구축한 수성과 방어체제를 600여 년 후에 고려군이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승리를 목전에 둔 연합군은 돌연 퇴각해서 만 안에 정박시킨 선박으로 귀환했다. 이후 새벽녘에 폭풍이 몰아쳐 900척 가운데 무려 200여 척이나 침몰했다. 북서풍이 몰아치는 초겨울의 현해탄은 파도가 매우 높고 거칠다. 거기에 하카다만은 섬들이 많아 물길이 복잡하다. 이 해역들을 경험한 나로서는 수전과 해양의 메커니즘에 능숙한 고려가 왜 이런 의문의 선택을 했는지 불확실하다.(윤명철, 《한국해양사》)
2차 전쟁 발발과 전투

쿠빌라이칸은 패전한 사실을 알지 못했고, 1275년부터 일본에 국서를 보냈다. 하지만 전쟁에 이긴 일본의 막부는 사신단들을 계속 참수시켰다. 뒤늦게 실상을 파악한 쿠빌라이칸은 1276년에 남송을 멸망시키자 준비를 했고, 1280년 8월에 일본을 재차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원나라의 정책과 적극적인 참여로 입장을 바꾼 쿠빌라이의 사위인 충렬왕의 협조로 결국은 연합군이 편성됐다. 동로군은 군사 2만명, 뱃사공·선원 등 1만7000명으로 구성된 고려군과 몽골군 1만 명으로 조직됐고, 전선은 900척이었다. 남송의 패잔병들이 다수 포함된 강남군은 10만명에 3500여 척의 전선이 참가했다.

1281년 음력 5월 3일 여몽연합군은 또다시 합포를 출발했다. 1차 때와 달리 대마도 전투에서는 실패했고, 이끼섬은 전염병까지 겹친 상황에서 고전하다가 점령했다. 그런데 5월 29일에 이끼섬을 가던 전선이 풍랑으로 행방불명됐다는 보고가 올라온 사실(《고려사》)을 보면 해상상황은 이미 안 좋았었다. 6월 보름 전에 이끼섬에서 합류할 강남군이 안 오자 내부에서는 선박의 문제와 군량미 부족 등을 이류로 회군이 두 차례나 논의됐으나, 김방경의 반대로 무산됐다.

결국 동로군은 음력 6월 6일에 독자적으로 하카타만을 공격했으나, 1차 때와 달리 방어체제를 보강한 일본의 저항에 부딪혀 내륙으로 진입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이키섬으로 돌아가 강남군의 도착을 기다리다가 7월 2일 본토로 이동했다. 그리고 음력 7월 27일, 동로군은 강남군과 합류해 다카섬에 상륙해서 하카타만을 공격하려 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30일, 다카섬 근해에 태풍이 불어 닥쳤다. 놀랍다 못해, 일본인들은 ‘가미가제(神風)’와 ‘기적’이라는 수사를 붙였지만, 자연은 두 번 씩이나 일본을 도운 것이다.

좁은 만 안에 정박시켜 놓은 연합군의 4000척 배들은 충돌하고 침수하면서 속수무책으로 침몰, 표류했다. 무려 2000여 척이 침몰했다. 아비규환이었다. 강남군은 전선 3500척과 군사 10만여 명으로 참전했다가 때마침 태풍을 만나 모두 익사했으며 시체가 포구로 흘러 들어가 막혔다고 기록했다. 주로 강남군인 포로들은 거의 참살됐고, 극소수만이 노예가 됐다. 다행히 고려군은 피해가 가장 적었지만, 1만7029명 가운데 7592명이 귀환하지 못했다. 뜻밖의 패배를 당한 대원의 쿠빌라이는 3차 원정을 계획했으나, 결국 1294년 80세를 일기로 역사에서 퇴장했고, 자연스럽게 일본 원정은 중단됐다.(정순태,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이 전쟁은 군대숫자, 전력, 전쟁경험과 기술, 무기 등만 보면 여몽연합군이 승리해야 했다. 그런데 일본이 대승리를 거뒀다. 여몽연합군의 전투 개시일 선정과 함대운영 방식, 지휘권의 갈등 등 내부사정과 국제질서 등의 요인들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일본은 분명 지형과 해양환경, 기후를 유효적절하게 활용해서 승리했다. 그리고 운이 너무나 좋았다. 개인에게 운과 운명이 있듯이 나라와 민족에도 분명 운이란 것이 있고, 역사는 필연 뿐만 아니라 우연도 예상외로 많이 작동한다는 예를 보여줬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특이한 이 국제전은 왜 발생했고, 실질적인 패전국인 고려의 내부갈등과 자주성, 그리고 국제적인 위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리고 승전국인 일본에는 어떤 변화를 야기시켰고, 그것은 이후 한민족과 맺어진 관계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을까? 그리고 강대국들의 영향을 받고, 분단된 채로 적대적인 충돌을 계속하고, 내부에서는 권력투쟁과 사회갈등이 심각한 약소국 아닌 약소국 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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